#기본기, 더 깊게
메모리 품귀인데 PC가 안 팔리는 이유
내용 요약중...
2026년 3분기 글로벌 PC 출하량은 5,700만 대로 전년 대비 21% 줄었고 4분기 전망은 -27%입니다. 반대로 마이크론의 2026 회계연도 매출은 1,331억 달러, 매출총이익률은 80.7%까지 치솟았습니다. 같은 부품을 두고 한쪽은 불황, 한쪽은 호황인 이 역설의 이름이 수요 파괴(demand destruction)입니다. DRAM·SSD가 PC 원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5%에서 40%로 뛴 구조와 HP·델·레노버·마이크론·샌디스크의 성적표가 갈리는 이유, 2028년까지 이어질 공급 부족과 가격 반전 리스크를 짚습니다.
기본기, 더 깊게
2026년 10월 26일 오전 7:54


노트북 한 대 바꿀 때가 됐다 싶어 견적을 뽑아본 분이라면, 올해 좀 이상한 경험을 하셨을 거예요. 작년에 보던 사양인데 가격이 몇십만 원씩 올라 있거든요. 같은 돈이면 한 단계 낮은 사양을 골라야 하고, 그러느니 쓰던 걸 반년만 더 쓰자는 결론에 이르기 쉽죠.
그런데 숫자를 들여다보면 앞뒤가 안 맞아요. PC가 안 팔린다는데, 그 PC에 들어가는 메모리를 만드는 회사들은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이크론 테크놀로지(Micron Technology)의 2026 회계연도 매출은 1,331억 달러로 전년(374억 달러)의 세 배가 넘었고, 매출총이익률은 80.7%까지 치솟았어요. 같은 부품을 두고 한쪽은 불황, 한쪽은 호황인 이 기묘한 상황의 이름이 수요 파괴(demand destruction)입니다.
가격이 오르면 손님이 줄어드는 게 아니라 사라진다
동네 삼겹살집을 떠올려볼게요. 1인분에 1만 2,000원이던 게 2만 5,000원이 됐어요. 손님은 어떻게 할까요? 삼겹살 대신 김치찌개를 시키거나, 아예 다른 식당을 찾겠죠. 문제는 그다음이에요. 나중에 고기값이 원래대로 돌아와도, 한 번 발길을 돌린 손님이 곧바로 돌아오지는 않거든요.
이게 '수요 감소'와 '수요 파괴'의 차이예요. 수요 감소는 가격이 오르면 소비량이 줄어드는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반면 수요 파괴는 가격 상승이 구매 자체를 포기하게 만들면서 시장의 크기 자체를 깎아내려요. 그리고 그렇게 사라진 수요는 가격이 되돌아와도 잘 복구되지 않습니다.
지금 PC 시장에서 벌어지는 일이 정확히 이거예요. 시장조사기관 옴디아(Omdia)에 따르면 DRAM과 SSD가 PC 제조 원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과거 15% 안팎에서 최근 40%에 육박합니다. DDR5 16Gb 계약가는 2025년 1월 3.75달러에서 2026년 4월 35달러로 약 9.3배 뛰었어요. 원가의 40%가 두 배, 세 배로 뛰면 완제품 가격을 올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죠.
그럼 소비자는 어떻게 반응할까요? 크게 두 갈래로 움직여요. 하나는 사양을 낮추는 '트레이드다운', 다른 하나는 교체 시기 자체를 미루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함정이 있어요. PC 제조사들이 원가를 흡수할 수 있는 고사양 모델 위주로 라인업을 재편하면서, 가격에 민감한 구매자는 저가형 선택지 자체가 사라지고 있거든요. 카운터포인트리서치의 민수 캉 수석애널리스트는 "가격이 구매 결정의 핵심이 되면서 시장 리더들조차 출하 모멘텀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짚었습니다.
결과는 숫자로 나왔어요. 2026년 3분기 글로벌 PC 출하량은 5,700만 대로 전년 대비 21%, 전분기 대비 13.8% 줄었습니다. 4분기 전망은 더 나빠요. 카운터포인트리서치는 4분기에 전년 대비 27% 추가 감소를 예상합니다. 2027년은 2026년과 비슷한 수준에 머물 전망인데, 이 기관의 데이비드 나란호 부총괄 표현을 빌리면 "안정화이지 회복이 아닙니다."
왜 하필 메모리만 귀해졌나
작은 주방에 화덕이 두 개뿐이라고 해볼게요. 그런데 고급 코스 요리 하나를 만드는 데 화덕 하나를 반나절씩 써야 합니다. 그러면 김밥 백 줄을 만들 화덕이 남지 않겠죠. 지금 메모리 시장이 딱 이 구조예요.
AI 데이터센터에 들어가는 고대역폭 메모리(HBM, High Bandwidth Memory)는 같은 용량을 만들기 위해 일반 DRAM의 3~4배에 달하는 웨이퍼를 씁니다. D램을 여러 층 쌓아 올리는 구조라 그만큼 원판이 더 필요한 거예요. 메모리 3사 입장에서는 같은 웨이퍼로 훨씬 비싸게 팔리는 HBM과 서버용 D램을 만드는 게 합리적이죠. 그 결과 PC와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범용 D램 공급이 뒤로 밀렸습니다.
여기에 AI 데이터센터 증설이 겹치면서 가격이 계단식으로 올라가요. 트렌드포스(TrendForce)는 2026년 4분기 일반 DRAM 계약가가 전분기 대비 1015%, 낸드플래시가 1520% 더 오를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2027년 HBM 혼합 평균판매단가는 전년 대비 121% 뛴다는 전망까지 나왔어요. 미국 노동통계국이 집계한 9월 반도체·전자부품 생산자물가지수도 전년 대비 26% 올랐는데, 6개월 연속 25% 이상 상승세입니다.
정리하면 이래요. AI가 메모리를 삼키면 → 범용 메모리가 귀해지고 → PC 원가가 뛰고 → 완제품 가격이 오르고 → 소비자가 구매를 포기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라, 한 번 포기한 구매는 가격이 안정돼도 곧바로 되살아나지 않는다는 게 수요 파괴의 무서운 지점이에요.
성적표는 왜 이렇게 갈릴까
같은 원가 충격인데 기업별 성적표는 극명하게 갈립니다. 먼저 부품을 파는 쪽부터 볼까요.
마이크론은 2026 회계연도에 매출 1,331억 달러, 매출총이익률 80.7%, 순이익 850억 달러를 기록했습니다. 조정 잉여현금흐름만 623억 달러예요. 2027 회계연도 1분기 가이던스는 매출 615억 달러, 매출총이익률 약 86%로 오히려 더 좋아집니다. 회사는 이미 2027년 출하량의 75% 이상을 계약으로 묶어뒀다고 밝혔어요. 샌디스크(SanDisk)도 AI 데이터센터용 낸드 수요 덕에 시가총액이 1,700억 달러를 넘어섰습니다.
반면 완제품을 파는 쪽은 사정이 다릅니다. HP의 2026 회계연도 3분기 매출은 157억 달러로 전년 대비 13% 늘었어요. 그런데 이게 좋은 소식이 아닙니다. 같은 기간 PC 출하 대수는 16% 줄었거든요. 대수는 줄고 단가가 올라 매출이 늘어난, 전형적인 '양은 줄고 값은 오른' 그림이죠. 개인시스템(PS) 부문 영업이익률은 4.6%로 장기 목표 범위를 밑돌았고, 총이익률도 18.8%로 떨어졌습니다. HP 최고재무책임자는 메모리·스토리지가 PC 원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년 전의 두 배인 35% 수준이라고 설명했어요.
델도 비슷합니다. 클라이언트솔루션그룹(CSG) 매출은 150억 달러로 20% 늘었지만, 상업용이 132억 달러(+22%)인 반면 소비자용은 18억 달러(+7%)에 그쳤어요. 기업 교체 수요는 버텼지만 개인 소비가 무너진 겁니다. 델 경영진도 실적 발표에서 "모든 제품의 원가 기반이 올라가고 있다"고 인정했습니다.
3분기 출하량을 브랜드별로 보면 온도차가 더 선명해요. 레노버가 1,500만 대로 1위를 지켰지만 전년 대비 23% 줄었고, HP는 31% 감소로 주요 업체 중 타격이 가장 컸습니다. 델은 25% 줄었죠. 반면 애플은 11% 감소에 그치며 점유율을 8.7%에서 9.8%로 오히려 높였고, 에이수스(ASUS)는 7% 감소로 선방했습니다. 프리미엄 포트폴리오를 가진 쪽이 가격 전가력을 갖고 있었다는 뜻이에요.
핵심은 이겁니다. 부품을 파는 쪽은 판가를 올려 이익을 키우고, 완제품을 파는 쪽은 원가를 전가하다 수요를 잃습니다. 같은 뉴스 헤드라인을 보고도 어느 밸류체인에 서 있느냐에 따라 성적표가 정반대로 갈리는 구간이에요.
2028년까지 이어지는 부족, 그리고 가격 반전의 그림자
그렇다면 이 구도는 언제까지 갈까요? 메모리 업체들의 답은 일관되게 '한참 남았다'입니다.
마이크론은 2027년과 2028년의 수급이 2026년보다 훨씬 타이트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신규 팹인 아이다호 ID1이 2027년 중반에 첫 웨이퍼를 뽑고, ID2는 2028년 말에야 가동됩니다. 회사는 "메모리 공급이 수요를 따라잡을 시점에 대한 가시성이 없다"고까지 표현했어요. 카운터포인트리서치는 D램·낸드 가격 상승세가 2027년 상반기에 다소 완화될 것으로 보지만, 이는 상승폭이 줄어드는 것이지 하락이 아니라고 선을 긋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투자자가 경계해야 할 지점이 세 가지 있어요.
먼저 2028년 이후의 공급 반전입니다. 신규 캐파가 한꺼번에 방출되면 지금의 가격 프리미엄이 순식간에 꺼질 수 있어요. 시장도 이걸 이미 반영하기 시작했습니다. 메모리 관련 상장지수펀드인 DRAM에서 10월 한 달에만 20억 달러가 빠져나갔는데, 4월 출시 이후 최대 규모의 월간 유출이자 3개월 연속 순유출이에요.
두 번째는 수요 파괴의 자기당착입니다. 메모리 회사 입장에서 PC용 범용 제품은 AI용보다 마진이 낮으니 지금은 버려도 되는 시장처럼 보여요. 그런데 PC 시장이 영구적으로 작아지면 결국 전체 메모리 수요의 판 자체가 줄어듭니다. 가트너는 원가 압박으로 500달러 미만 엔트리급 PC 세그먼트가 2028년까지 사라질 수 있다고 경고했어요. 저가형 시장이 사라지면 그 구간에서 시작하던 신규 수요 유입도 함께 끊깁니다.
세 번째는 재고 조정의 파동이에요. 2026년 상반기에는 가격 인상과 관세를 예상한 유통 채널의 선구매가 몰렸습니다. 그 재고가 소화되는 과정에서 일시적인 주문 공백이 나타날 수 있죠. 실제로 HP는 3분기 말 재고자산이 103억 달러, 재고일수 73일로 전분기와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다고 밝혔습니다. 비싸게 사둔 재고가 손익계산서를 통과하는 구간에서는 마진이 한 번 더 눌릴 수 있어요.
반대로 기대해볼 수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미뤄둔 교체 수요예요. 2025년 윈도우10 지원 종료를 앞두고 한 차례 수요가 당겨졌지만, 그 이후 계속 미뤄온 기업·개인 교체 수요가 쌓여 있습니다. 메모리 가격 상승폭이 꺾이는 순간 이연 수요가 한꺼번에 터질 여지가 남아 있어요. 기업용 시장이 개인용보다 상대적으로 버틴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수요 파괴는 사이클의 끝이라기보다 다음 사이클의 시작을 앞당기는 신호일 수 있어요. 메모리 가격 상승폭이 실제로 꺾이는 시점, 그리고 그때 밀려 있던 PC 교체 수요가 어느 정도 되살아나는지를 함께 놓고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