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구조
석유를 파는 손과 국채를 사던 손은 같은 손이었다
내용 요약중...
유가 100달러 시대에 미 30년물 금리가 2007년 이후 최고치를 찍는 역설의 뿌리는 석유달러 순환에 있다. 걸프의 석유 대금이 미 국채로 되돌아오는 구조가 미국의 싼 이자를 50년간 지탱해 왔다면, 지금은 사우디가 1990년 이후 최저 생산량을 기록하고 노르웨이 국부펀드는 미 국채 비중을 34%에서 22%로 줄이는 안을 냈다. 60억 달러 바이백이 금리를 끌어내리지 못한 이유, 호르무즈의 포화와 워싱턴 채권시장의 동요가 하나의 끊긴 순환 고리에서 나온다는 점을 '석유 채무자 국가'라는 렌즈로 추적한다. 9·11 25주년, 질서를 세우던 무력이 질서의 통로를 닫는 역순이 진행 중이다.
시대의 구조
2026년 9월 11일 오전 6:27


사우디아라비아가 OPEC에 보고한 8월의 원유 생산량은 하루 623만 8천 배럴이었습니다. 한 달 새 190만 배럴이 증발한 숫자고, 1990년 걸프전이 터진 해 이후 처음 보는 수준입니다. 관측 가능한 수출량은 하루 300만 배럴 안팎까지 떨어졌습니다. 사우디는 땅에서 덜 뽑은 만큼 저장 탱크를 열어 '시장 공급량'을 712만 배럴로 부풀려 보고했습니다. 창고를 털어 단골을 붙잡은 셈입니다.
같은 주, 워싱턴에서는 미 재무부가 장기국채를 되사는 바이백 상한을 기존의 세 배인 60억 달러로 올리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시장은 80억에서 100억 달러를 기대했는데요.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10년물 금리는 2023년 이후 최고치로, 30년물은 5.3%를 넘기며 2007년 이후 최고 수준까지 올랐습니다. 다음 날 실제 매입액은 51억 9천만 달러, 발표한 상한에도 못 미쳤습니다.
상식적으로는 이상합니다.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돌파했으니 걸프로 흘러들어간 달러가 미국 국채로 되돌아와 금리를 눌러야 마땅하니까요. 그런데 지금은 유가가 오를수록 국채 금리가 함께 오릅니다. 왜 그럴까요. 석유를 파는 손과 국채를 사던 손이 사실은 같은 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손이 지금 한쪽은 묶였고, 다른 한쪽은 조용히 자리를 뜨고 있습니다.
석유 채무자 국가
1971년 8월 15일, 닉슨 대통령은 달러와 금의 교환을 일방적으로 중단했습니다. 금본위의 사망 선고였는데요. 남은 질문은 하나였습니다. 금의 담보를 잃은 달러를 왜 계속 받겠느냐는 것.
답은 석유였습니다. 1970년대 중반부터 미국과 걸프 산유국들은 석유 결제를 달러로 하고, 그 대금의 잉여를 미 국채로 운용하는 구조를 공고히 했습니다. 이후 반세기의 세계 경제는 하나의 순환 고리 위에서 돌았습니다. 미 해군이 걸프를 지키고, 석유는 달러로 팔리고, 걸프의 달러 잉여는 미 국채로 흘러가고, 미국은 싼 이자로 돈을 빌리고, 그 돈으로 해군을 유지합니다. 어느 마디 하나가 다음 마디의 담보였습니다.
미국은 1985년부터 줄곧 순채무국이지만 이자 걱정은 크지 않았습니다. 채권자 명단이 곧 석유 지도였기 때문입니다. 사우디와 쿠웨이트, UAE, 노르웨이의 석유 기금, 석유 달러 시대에 부를 쌓은 일본과 중국까지. 이들은 달러를 받을 수밖에 없었고, 받은 달러를 굴릴 무위험 자산은 사실상 미 국채 하나였습니다.
이 구조를 한 단어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미국은 석유 채무자 국가였습니다. 부채의 담보가 금이 아니라 석유였던 나라. 걸프에서 팔린 기름 한 배럴이 사실상 미 국채 한 장에 대한 청약이던 시대. 기축통화의 특권은 미국이 부자여서 누린 게 아니라, 채권자들이 석유를 파는 한 달러를 놓을 수 없어서 누린 것이었습니다.
미국의 값싼 이자는 금융의 성취가 아니라 지정학의 성과였습니다.
하우스의 패배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은 정부와 시장 중 누가 강한지 몸으로 배운 사람입니다. 1990년대 초 그는 조지 소로스의 펀드에서 파운드화 약세에 베팅했고, 영국 중앙은행의 방어는 하루 만에 무너졌습니다. 거기서 얻은 교훈은 단순합니다. 무한한 탄약이 없는 정부는 가격을 지킬 수 없다.
30년 뒤, 그는 지키는 쪽에 서 있습니다. 8월 19일 30년물 금리가 2007년 이후 최고치를 찍자 재무부는 정기 공고 주기를 깨고 바이백 확대를 기습 발표했습니다. 9월 9일에는 상한을 20억 달러에서 60억 달러로 올렸죠. 그는 이를 연준의 오퍼레이션 트위스트를 본뜬 '재무부 트위스트'라 불렀고, 목표도 스스로 밝혔습니다. 균형 가격 자체는 바꿀 수 없지만, "미국이 부채를 갚지 못한다"는 내러티브가 가격에 박히는 속도만은 늦추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시장은 매도로 답했습니다. 왜일까요. 시장이 기다린 건 규모가 아니라 '충격'이었기 때문입니다. 60억 달러라는 숫자가 나오자 10년물 금리는 4.85%까지 올라 2023년 이후 최고치를 경신했고, 이틀 뒤 30년물 입찰은 5.308%에 낙찰됐습니다. 2001년 이후 가장 높은 낙찰금리입니다. 도이체방크 전략가는 "재무부가 먹이를 계속 줘야 하는 괴물을 스스로 만들었다"고 했고, 브라운 브라더스 해리먼은 "탱크전에 물총을 들고 나온 격"이라고 했습니다. 아이러니도 있습니다. 베선트는 2년 전 이 전략을 분석하며 '단기적으로는 효과가 있지만 중기적으로는 없다'고 결론 내린 사람입니다. 지금 증명되는 건 그 결론의 후반부가 아니라, 단기조차 깨졌다는 더 가혹한 사실입니다.
엔화 시장에서 그는 이겼다는 점이 대조를 더합니다. 엔화를 공매도한 트레이더들에게 "나는 카지노의 하우스다. 내기하려면 마음대로 해라"라며 일본 통화정책에 대한 '비대칭 정보'를 과시했고, 일본은행의 금리 인상 기대와 맞물려 엔화는 실제로 강세로 돌아섰습니다. 외환 시장에서는 허세가 통했습니다.
미 국채 시장은 다릅니다. 하루 1조 달러가 오가는 32조 달러 시장에, 연간 발행 규모는 2조 달러를 넘습니다. 과거에 구두 개입이 성공했던 플라자 합의든 일본의 수익률 곡선 통제든, 그 뒤에는 무한한 통장을 든 중앙은행이 있었습니다. 재무부의 통장은 유한합니다. 부채는 40조 달러를 넘었고, 연간 이자 1조 1,700억 달러는 국방예산보다 큽니다. 그 와중에 트럼프 대통령은 중간선거 승리 시 성인 한 명당 5천 달러를 나눠 주겠다고 공언했습니다. 새 지출의 그림자는 딜러들의 호가에 그대로 박혔습니다.
하우스는 카드를 정할 수 있지만, 손님의 지갑까지 열 수는 없습니다.
1990년의 숫자
623만 8천 배럴. 이 숫자를 다시 읽는 방법은 하나입니다. 1990년의 숫자라는 것.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했던 해의 수준입니다. 당시 사우디는 남의 감산분을 메우는 소방수였습니다. 이번엔 사우디 자신이 불탑니다.
불을 끄지 못하는 이유는 바닷길에 있습니다. 사우디의 원유는 두 문으로 나갑니다. 동쪽의 호르무즈 해협과, 홍해로 이어지는 서쪽 대체 수출로. 호르무즈는 미국과 이란의 유조선 공방 속에 하루 통항 선박이 한 자릿수까지 떨어졌습니다. 전쟁 전 10일 평균이 하루 100척 안팎이던 물동량입니다. 그럼 홍해가 남는데, OPEC 월간 보고서가 나오던 날 후티 반군이 홍해의 관문 항구 도시 모카를 점령했습니다. 바브엘만데브 해협을 사실상 조준거리에 두는 거점입니다. 사우디는 두 비상구가 동시에 조여오는, 겪어 본 적 없는 구도에 놓였습니다.
이 숫자는 빈 살만 왕세자의 비전 2030에 정통으로 꽂힙니다. 사우디의 재정 균형 유가는 배럴당 80~90달러로 추정됩니다. 지금 유가는 100달러를 넘었습니다. 사상 최고의 가격표를 앞에 두고, 사우디는 그 기름의 3분의 2를 실어 내지 못합니다. 올해 1분기 재정은 335억 달러 적자를 기록했고, 국부펀드 PIF는 메가 프로젝트에 80억 달러의 자산 가치 감액을 반영했습니다. 170km짜리 선형 도시 '더 라인'은 2.4km짜리 시범 구간으로 축소됐고, 예산안에는 기존 계약을 깨는 위약금으로만 160억 달러가 책정됐습니다. 석유를 팔아 석유 의존에서 벗어나겠다는 계획이, 석유를 못 파면서 먼저 무너지고 있는 겁니다.
주변도 무너집니다. OPEC은 5월 UAE가 탈퇴하며 창립 이래 최대 타격을 입었습니다. UAE는 OPEC 생산량의 12%를 차지하던 3위 산유국이자, 호르무즈를 우회하는 푸자이라 항을 가진 몇 안 되는 회원국입니다. 미국의 영향권으로 편입된 베네수엘라는 탈퇴를 검토 중이고, 이라크는 생산 기준선을 하루 600만 배럴으로 올려 달라며 탈퇴 카드를 흔듭니다. 카르텔의 규율은 여유 생산 능력과 우회 수출로라는 두 가지 자산으로 유지돼 왔는데요. 둘 다 갖춘 나라는 떠났고, 여유 능력은 있지만 우회로가 부족한 사우디만 남아 남의 이탈을 막고 있습니다.
50년간 시장에 감산을 명해 온 왕이, 이번에는 전쟁에 감산을 당했습니다.
채권자의 편지
9월 1일, 노르웨이 중앙은행 산하 국부펀드 NBIM이 재무부에 보낸 편지 한 통이 있었습니다. 채권 포트폴리오에서 정부채 비중을 70%에서 50%로 낮추고, 미 국채 비중은 34.1%에서 21.9%로 줄이자는 안이었습니다. 2.2조 달러를 굴리는 세계 최대 국부펀드가 미 국채를 750억 달러어치 덜 사겠다는 얘기인데요. 줄어든 자리는 일본 국채와 미국 회사채로 채우게 됩니다.
이 편지의 핵심은 숫자가 아니라 이유입니다. NBIM은 이렇게 썼습니다. 과거 위기에서 정부채는 포트폴리오의 변동성을 낮추는 안전판이었지만, "정부채 자체가 위기의 중심이 될 경우"엔 그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40년간 채권은 주식의 헤지였습니다. 위기가 늘 민간 부문에서 왔으니까요. 이제 위기의 발원지가 채권의 발행자 자신입니다. 무위험 자산의 발행자가 리스크가 되는 순간, 분산 투자의 문법이 바뀝니다.
노르웨이만 그런 게 아닙니다. 중국의 미 국채 보유액은 6,334억 달러로 2008년 이후 최저입니다. 정점 때 1조 3천억 달러를 넘기던 잔고의 절반 이하로 내려왔습니다. 최대 보유국 일본은 1월의 1조 2,253억 달러에서 6월에 1조 1,167억 달러로 줄였고, 앞으로도 더 팔아야 합니다. 7월 말부터 8월까지 엔화 방어에 15조 엔이 넘게 들었고, 그 상당분은 달러 자산 매각으로 조달됐다는 관측입니다.
걸프의 잔고는 아직 견조합니다. 사우디의 6월 보유액은 1,425억 달러로 공식 집계상 오히려 늘었는데요. 다만 흐름은 다릅니다. 걸프 국부펀드들은 방산 지출과 국내 프로젝트, 전쟁 복구 비용을 마련하려고 미국 자산을 내놓는다는 분석이 잇따릅니다. 사우디의 PIF는 새 5개년 전략에서 자본의 80%를 국내에 배분하기로 했습니다. 미국을 떠나는 게 아니라, 미국 밖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값을 치르느라 파는 겁니다. 시장이 보는 결과는 같은 셈입니다.
대체재는 이미 골라졌습니다. 지난달 글로벌 금 ETF에는 180억 달러가 순유입돼 기록 시작 이래 두 번째로 큰 규모를 남겼습니다. 일부 중앙은행에서는 금 보유 비중이 미 국채를 넘어섰고, 2024년에는 전 세계 중앙은행의 금 보유량이 달러 보유량을 처음으로 추월했다는 집계도 나왔습니다. 무위험 자산을 향한 수요는 줄지 않았습니다. 사라진 건 그 수요가 미 국채로 무조건 흘러들어가던 습관입니다.
9·11의 역순
25년 전의 오늘, 미국은 중동으로 들어갔습니다. 2001년 9월 11일의 테러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으로 이어졌고, 걸프에 상주한 미군은 '항행의 자유'를 담보했습니다. 그 담보 위에서 순환 고리가 돌았습니다. 해군이 해협을 지키고, 유조선이 지나가고, 달러가 걸프에 쌓이고, 그 달러가 워싱턴으로 돌아가는.
25주년의 오늘, 방향이 뒤집혔습니다. 미국은 이란과 전쟁 중이고, 그 전쟁이 호르무즈를 조이고 있습니다. 질서를 세우겠다고 들어간 무력이, 질서의 통로를 닫은 전쟁이 됐습니다. 요르단의 미군 기지는 미사일을 맞았고, 쿠웨이트와 바레인 항구는 공격 경고를 받았습니다. 이 전쟁에서 미군 18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군 지휘부는 종전 시 중동 병력과 기지를 줄이는 방안, 일부 시설을 지하화하는 방안까지 검토 중입니다.
걸프의 왕들은 결론을 내리는 중입니다. UAE 대통령 고문은 "국가의 안보가 최우선인데, 타인에게 완전히 의존할 때 그들이 항상 우리를 최우선으로 여기리라 가정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사우디는 8월, 터키·파키스탄과 '메카 협약'이라 불리는 공동 방위 체계를 맺었습니다. 카타르 대변인은 "미국과의 전략적 파트너십에만 의존해서는 안 되며, 안보의 자급자족이 유일한 전진 방향"이라고 못 박았습니다.
순환 고리의 첫 마디는 '미 해군이 걸프를 지킨다'였습니다. 2026년의 미군은 여전히 걸프에 있지만, 지켜 주는 존재가 아니라 싸우는 당사자입니다. 첫 마디가 끊기면 나머지는 순서대로 풀립니다. 석유가 못 팔리고, 달러가 안 쌓이고, 국채가 안 팔리고, 이자가 비싸지고, 그 비싼 이자를 낼 재정이 해군을 유지하기 어려워지는. 이번 주의 유가와 금리가 동시에 보여 준 건, 끊긴 고리 한 바퀴가 통째로 소리를 내며 풀리는 모습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해협이 열리면 이 순환의 일부는 되살아날 겁니다. 사우디가 다시 펌프를 돌리면 달러는 걸프로 흘러들어 갈 테니까요. 다만 되살아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노르웨이의 편지는 몇 년에 걸쳐 천천히 실행될 인덱스 개정안이고, 중국의 잔고는 이미 2008년 수준까지 내려와 있습니다. 중국 인민은행의 금 매입은 22개월째 이어지고, 걸프는 '메카 협약'이라는 새 이름의 안보를 배웠습니다. 유가는 되돌려도, 채권자들의 숙제는 되돌리지 않습니다.
석유 채무자 국가의 특권은 달러가 기축통화라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기축통화의 이자를 유전이 대신 냈다는 데 있었습니다. 미국은 지금 처음으로 시장이자율을 온전히 물어야 하는 40조 달러의 채무자가 되어 가고 있고, 30년물 5.3%는 그 시험의 첫 고지입니다. 1971년에 금을 잃은 달러는 석유를 새 담보로 삼았습니다. 다음 담보가 무엇일지, 아직 아무도 답안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그 답이 나올 때까지 우리는, 유가와 금리가 같은 방향으로 오르는 낯선 시장에 좀 더 오래 익숙해져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