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구조
가장 안전한 자산의 가격이 정부를 긴축시킨다
내용 요약중...
2026년 8월, 미국 30년물 국채 낙찰 금리 5.216%는 2001년 이후 최고치다. 물가는 둔화되는데 장기 금리는 오르는 역설이 벌어지고 있다. 원인은 연준의 통화정책이 아니라 40조 달러 부채와 연간 2조 달러 재정 적자, 그리고 AI 인프라 투자가 촉발한 자본 희소성 전환이다. 채권 시장이 연준을 대신해 정부에 긴축을 강요하는 채권 자경단의 귀환과, 한국은행의 13년 만에 금 매입이 말해주는 달러 체제의 균열을 추적한다.
시대의 구조
2026년 8월 14일 오전 6:27


2026년 8월 13일, 미국 재무부가 250억 달러 규모의 30년물 국채를 발행했습니다. 낙찰 금리는 5.216%. 2001년 이후 최고치였죠. 이틀 전 10년물 국채 입찰에서도 4.683%로 2007년 금융위기 이후 최고 수준을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주, 7월 소비자물가지수(CPI)가 발표되었습니다. 전년 대비 3.4% 상승으로 둔화세를 보였고, 근원 CPI는 2.5%까지 내려왔습니다. 시장은 연준의 9월 금리 인상 가능성을 40% 미만으로 낮췄습니다.
물가가 잡히는데 장기 금리는 오릅니다. 직관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현상입니다.
왜 그럴까요. 장기 금리가 더 이상 연준의 통화정책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단기 금리는 연준이 정하지만, 10년·30년 금리는 투자자들이 미국 정부의 재정 건전성과 미래 인플레이션, 그리고 전 세계 자본의 희소성을 판단해서 정합니다. 지금 그 판단이 바뀌고 있습니다.
스콧 베센트
스콧 베센트 미국 재무장관은 스스로를 '전국 최고의 채권 영업사원'이라 부릅니다. 취임 초기부터 10년물 국채 금리를 4% 미만으로 낮추는 것을 목표로 삼았죠. 헤지펀드 출신으로 시장의 흐름을 읽는 데 익숙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의 목표와 거리가 멉니다. 10년물은 4.7%를 넘나들고, 30년물은 5.2%에 육박합니다. 베센트 장관이 가용한 모든 도구를 동원하고 있습니다. 1998년 이후 처음으로 일본과 공동 외환 개입에 나섰고, 일본이 엔화 방어를 위해 미국 국채를 매각하는 것을 막기 위해 연준의 레포 시설(FIMA) 확대를 지지했습니다. 재무부는 분기 발행 계획의 문구를 '잠재적 증가'에서 '잠재적 변화'로 수정해 장기채 발행 축소 가능성을 시사했죠.
그런데 시장은 반응하지 않습니다. 8월 13일 30년물 입찰에서 간접 입찰자 비중은 66.8%로, 7월의 77.7%에서 급감했습니다. 수요가 부족한 자리를 1차 딜러가 떠안았죠. 베센트 장관이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습니다. 연간 2조 달러에 육박하는 재정 적자와 40조 달러 국가 부채를 줄이지 않는 한, 발행 문구 수정은 '언 발에 오줌 누기'라는 평가가 시장에서 나옵니다.
1994년의 교훈
1994년 2월 4일, 연준 의장 앨런 그린스펀은 기준금리를 25bp 인상했습니다. 이후 13개월간 7차례에 걸쳐 금리를 올렸고, 연방기금금리는 3.05%에서 6.05%로 두 배 가까이 뛰었습니다.
시장은 예상치 못한 속도에 놀랐습니다. 30년물 국채 금리는 1994년 1월 6.17%에서 11월 8.16%로 약 2%p 급등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약 1.5조 달러의 채권 시장 가치가 증발했습니다. 이 사건은 이후 '채권 대학살(Bond Massacre)'로 불렸죠.
가장 비극적인 피해자는 캘리포니아주 오렌지 카운티였습니다. 재무관 로버트 시트론은 금리가 계속 낮을 것이라는 가정하에 인버스 플로터라는 파생상품에 레버리지를 걸어 75억 달러를 운용하고 있었습니다. 금리가 오르자 포트폴리오 가치가 수직 하락했고, 마진콜이 쏟아졌습니다. 결국 1994년 12월 6일, 오렌지 카운티는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지방 정부 파산을 선언했습니다. 16~17억 달러가 공중분해됐죠.
이 사건은 하나의 교훈을 남깁니다. 통화정책의 변화가 채권 시장을 거쳐 레버리지를 가진 투자자를 붕괴시키는 도미노는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채권 자경단의 귀환
채권 자경단(bond vigilantes). 1980년대 전략가 에드 야데니가 만든 개념입니다. 인플레이션을 유발하는 재정·통화정책에 반발해 국채를 매도함으로써 금리를 끌어올리는 시장 참여자들을 뜻합니다.
2026년 여름, 이 개념이 다시 소환되고 있습니다. 거시 전략가 짐 비안코의 분석은 흥미롭습니다. 2024년 9월부터 연준이 총 175bp 금리를 인하했음에도, 10년물 국채 금리는 98bp, 30년물은 125bp나 올랐습니다. 1971년부터 55년간의 정책 주기를 분석해도, 연준이 금리를 내리는 동안 장기 금리가 이렇게 급등한 사례는 1980년 한 번뿐이었죠. 그마저도 119일 만에 연준이 인상으로 전환하며 시장과 보조를 맞췄습니다. 반면 지금은 약 693일 동안 6차례 연속 인하했는데도 장기 금리는 폭등했습니다.
비안코는 이를 '채권 시장이 연준의 정책 경로가 완전히 틀렸다고 외치고 있다'고 해석합니다. 연준이 긴축 책임을 다하지 않자, 채권 시장이 스스로 장기 금리를 끌어올려 사적 긴축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거죠.
물론 이 해석에 반론도 있습니다. 채권 자경단이라는 개념 자체가 투자자들의 행위를 마치 정치적 액티비즘처럼 묘사하는 데 대한 비판이 있죠. 실제로는 인플레이션 위험이나 재정 건전성 악화에 대한 합리적 위험 관리일 뿐이라는 지적입니다. 투자자들이 국채를 파는 이유는 정부를 벌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산 가치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겁니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습니다. 시장이 연준 대신 긴축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자본 희소성의 시대
2026년 8월, 골드만삭스는 글로벌 시장이 '저축 과잉' 시대에서 '자본 희소성' 시대로 전환되고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과거 20년간 글로벌 금리를 낮추던 중앙은행들의 유동성 공급이 축소되고 있습니다. 동시에 세 가지 거대한 자본 수요가 한정된 글로벌 자본을 흡수하고 있죠. AI 인프라 투자(연간 8,000억 달러 이상), 재산업화와 국방 재정비, 그리고 주권 부채 리파이낸싱 수요입니다. 2026 회계연도 미국 정부의 순이자 비용은 1.17조 달러를 돌파해 처음으로 국방 예산을 초과했습니다.
7월 한 달 적자 4,323억 달러는 역대 최고치입니다. 같은 달 국채 순이자 지출만 1,040억 달러였습니다. 의료보험 지출 1,740억 달러, 사회보장 1,410억 달러에 이어 이자 비용이 세 번째로 큰 지출 항목이 됐습니다.
부채 규모가 다르기도 합니다. 2001년에도 30년물 금리가 5%대였지만, 당시 미국 국채 시장 규모는 약 3조 달러였습니다. 지금은 31조 달러를 넘었습니다. 같은 5%라도 부담은 10배 가까이 무겁습니다.
이게 자본 희소성이라는 구조적 전환의 핵심입니다. 과거에는 전 세계 저축이 미 국채를 찾아왔지만, 이제는 AI 데이터센터 건설과 정부 부채 발행이 같은 자본 풀에서 경쟁합니다. 안전자산의 편의수익률이 하락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국채를 보유하는 것이 더 이상 특별한 유동성 프리미엄을 주지 못하는 시대가 되고 있죠.
트러스 모멘트
2022년 9월 23일, 영국 리즈 트러스 총리와 콰시 콰텐 재무장관은 재원 조달 방안 없이 450억 파운드 규모의 감세안을 발표했습니다. 시장의 반응은 즉각적이었습니다. 파운드화가 사상 최저치인 1.03달러까지 폭락했고, 30년물 영국 국채 금리는 4일 만에 약 160bp 급등했습니다.
문제는 단순한 금리 상승에 그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영국의 퇴직연금 펀드들이 사용하던 LDI(부채연계투자) 전략이 무너졌습니다. 국채 가격이 폭락하자 파생상품 포지션에서 막대한 평가 손실이 났고, 마진콜이 쏟아졌습니다. 현금이 부족해진 연금 펀드들은 가장 유동성이 좋은 국채를 매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국채 가격이 더 떨어지고, 금리가 더 오르고, 마진콜이 더 커지는 죽음의 소용돌이가 시작됐죠. 결국 영란은행이 650억 파운드 규모의 장기 국채 매입에 나서며 시장을 겨우 진정시켰습니다. 트러스 총리는 37일 만에 사임했습니다.
이 사건이 보여주는 구조는 명확합니다. 재정 정책이 시장의 신뢰를 잃었을 때, 레버리지를 사용하는 금융 기관을 통해 시스템 전체의 위기로 번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2026년 8월, 일본에서 유사한 조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카이치 사나에 정부의 확장적 재정 정책으로 일본 10년물 국채 금리가 2.805%까지 치솟았습니다. 3%를 넘으면 새로운 매도세가 촉발될 임계점으로 시장은 보고 있습니다. 일본은 GDP 대비 공공 부채 비율이 214%로 G7 최고 수준입니다. 금리를 올릴 수도, 내릴 수도 없는 일본은행의 딜레마가 깊어지고 있죠.
금의 귀환
2026년 8월 13일, 한국은행이 13년 만에 금 투자를 재개했다는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미국 SEC 공시에서 한국은행은 SPDR Gold Trust(GLD) 67만 9,765주를 보유하고 있었고, 2분기 말 평가액은 약 2억 5,000만 달러였습니다.
한국은행만이 아닙니다. 세계금위원회(WGC)에 따르면 2026년 2분기 중앙은행 순 금 매입량은 289톤으로, 전년 동기 대비 62% 급증했습니다. 역대 2분기 최대치입니다. 2025년 말 기준 금이 전 세계 외환보유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7%로, 미국 국채의 22%를 넘어섰습니다. 1996년 이후 29년 만에 일어난 일이죠.
중앙은행 설문에서 응답자의 74%가 5년 내 달러 비중이 하락할 것으로 예상했고, 83%는 금 비중이 높아질 것이라 답했습니다. 금은 수익이 없는 무이자 자산이라는 단점이 있고, 결제 수단으로도 쓸 수 없습니다. 달러를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죠.
그런데도 중앙은행들이 금을 사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달러 자산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 재정 적자가 GDP의 6%에 달하고, 국채 금리가 연준의 통제를 벗어나는 상황에서, 가장 기본적인 대비 자산으로 회귀하는 것이 금입니다. 한국은행이 외환보유액에서 금 비중이 1.1%에 불과하다는 점도 고려했을 겁니다. 다른 나라에 비해 현저히 낮은 수준이었죠.
가장 안전한 자산이라 불리는 미국 국채의 금리가 5%를 넘고, 중앙은행들이 금을 사들이는 시대. 안전자산의 가격은 곧 신뢰의 가격인데, 지금 그 신뢰가 재평가되고 있습니다.
연준이 금리를 내려도 장기 금리가 오르는 현상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미국 정부가 재정 적자를 통제할 의지가 있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 의지가 보이지 않는 한, 채권 시장의 사적 긴축은 계속될 겁니다. 어쩌면, 우리는 안전자산의 정의가 바뀌는 과도기를 지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