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기, 더 깊게
스태그플레이션의 조건, 물가는 끈질기고 경기는 늘어진다
내용 요약중...
미국 연준이 3년 만에 기준금리를 3.75~4.00%로 올렸지만 물가는 목표치의 두 배 가까이에 있고, 유가는 배럴당 100달러 위에서 버티고 있습니다. 미국 디젤 가격은 연초의 3.5달러에서 6달러를 넘어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죠. 금리를 올리면 경기가, 내리면 물가가 나빠지는 스태그플레이션의 공식이 50년 만에 다시 성립할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 국면에서는 주식과 채권이 함께 흔들리는 대신 에너지와 금, 단기채가 조명받습니다.
기본기, 더 깊게
2026년 9월 18일 오전 9:18


요즘 마트에서 장을 보면 지난주보다 비싼 게 눈에 띄는 일이 부지기수예요. 그런데 정작 뉴스나 회사 주변 분위기는 '경기가 안 좋다'는 말로 가득하죠. 물가는 오르는데 살림은 팍팍해지는 이 불편한 조합, 사실 50년 전에 한 번 겪은 적이 있어요.
지난주 국제유가는 배럴당 100달러를 돌파했고, 미국 디젤 가격은 연초의 3.5달러에서 갤런당 6달러를 넘어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어요. 그런데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준(Fed)은 3년 만에 금리를 올려 기준금리를 3.75~4.00%로 결정했죠. 물가를 잡겠다고 경기에 찬물을 끼얹는 판인데, 주택 판매는 31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내려앉았고 소비자심리는 팬데믹 시기 저점 부근까지 떨어졌어요. 물가와 경기가 같은 방향으로 나빠지는 이 국면의 이름이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입니다.
몸은 늘어지는데 열이 나는 경제
스태그플레이션은 경기 정체(Stagnation)와 물가 상승(Inflation)을 합친 말이에요. 열은 38도로 치솟는데 몸에는 기운이 하나도 없는 상태를 상상하면 돼요. 열(물가)을 잡으려고 해열제(긴축)를 먹으면 몸(성장)은 더 처지고, 기운을 돋우려고 영양제(부양)를 놓으면 열이 다시 오르죠. 약은 하나인데 병은 두 가지인 겁니다.
원래 경제학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배워요. 물가와 실업은 시소처럼 반대로 움직인다는 필립스 곡선(Phillips Curve)이 그런 논리인데요. 시장이 과열하면 물가가 오르고, 경기가 식으면 고용이 나빠지죠. 그래서 중앙은행은 물가가 문제면 금리를 올리고, 일자리가 문제면 금리를 낮춰왔어요.
그런데 이 시소가 고장 나는 순간이 있어요. 왜 그럴까요? 이유는 수요가 아니라 공급에 있어요.
동네 치킨집을 생각해 보죠. 원가가 올라 양념통닭을 2만 원에서 2만 5천 원으로 올리면 소비자는 주문을 줄이고, 가게는 값이 오른 것과 매출이 줄어든 것을 동시에 겪어요. 값이 오르고 소비가 줄어드는 이 그림이 스태그플레이션의 축소판인데, 지금 글로벌 경제의 치킨집 원가가 바로 유가예요.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반년 넘게 이어지고 사우디 우회 송유관까지 피격당하면서, 원가는 물가를 밀어 올리는데 공급은 막혀 성장을 깎아먹고 있거든요.
1970년대의 악몽, 그때와 무엇이 다른가
스태그플레이션의 원조는 1970년대예요. 1973년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금수 조치로 유가는 배럴당 3달러에서 12달러로 4배 뛰었고, 1979년 이란 혁명이 다시 한 번 끌어올렸죠. 미국 물가는 1980년 3월 연 14.8%까지 치솟았고, 실업률은 1982년 10.8%까지 올라갔어요. 두 자릿수 물가와 고실업이 공존했던, 교과서를 다시 쓰게 만든 시기였습니다.
이 악순환의 엔진은 임금-물가 나선(Wage-Price Spiral)이었어요. 물가가 오르니 노조가 임금 인상을 요구하고, 임금이 오르니 기업이 가격을 올리는 식으로 고리가 돌았죠. 이 고리를 끊은 사람이 폴 볼커 전 연준 의장이었어요. 금리를 무려 20% 선까지 끌어올리는 볼커 쇼크(Volcker Shock)로 경기침체를 감수하고서야 기대심리를 꺾었으니, 공급 충격을 금리로 못 고칠 땐 수요를 파괴해서라도 물가부터 잡는다는 교훈을 남겼어요.
그렇다면 지금은 1970년대의 재현일까요? 아직은 아니라는 게 다수 의견이에요. 미국 물가는 14%가 아니라 3%대고, 노동 시장은 실업률이 4.1%로 낮지만 뽑지도 자르지도 않는 정체 상태라 임금-물가 나선의 흔적이 희미해요. 영국 임금 상승은 오히려 둔화되고 있고, AI 인프라 투자가 성장의 버팀목이 되어 주면서 유가 100달러에도 미국 경기는 아직 버티고 있죠.
다만 방심할 근거는 되지 못해요. 도이체방크는 최근 보고서에서 글로벌 경제가 수요 부족의 시대에서 공급 제약의 시대로 넘어갔다고 진단했는데요. 2010년대에 통했던 플레이북, 즉 기다리면 물가는 내려오고 금리를 내리면 성장이 살아나는 방식이 공급이 좁아진 시장에서는 작동하지 않는 거죠. 1970년대의 진짜 교훈은 개별 충격은 넘기더라도 충격이 거듭되면 기대심리가 무너진다는 건데, 관세와 전쟁, 해협 봉쇄가 최근 2년간 연달아 겹쳐왔다는 점이 지금 가장 불편한 대목이에요.
시장은 이미 값을 매기고 있다
스태그플레이션은 아직 확정된 진단이 아니에요. 그럼 시장은 뭘 하고 있을까요? 진단이 나오길 기다리지 않고 가격부터 움직이죠. 에너지 쪽이 가장 먼저 반응했는데, 원유 ETF인 USO는 연초 대비 125% 안팎의 수익률을 기록했고 엑슨모빌과 셰브론 같은 미국 에너지주, 온스당 4,300달러를 웃도는 금까지 함께 올랐어요.
반면 채권은 무너지고 있어요. 보통 경기침체가 오면 돈은 안전한 채권으로 피하곤 하는데, 스태그플레이션에서는 물가가 채권의 이자수익을 갉아먹어 피난처 구실을 못 해요. 실제로 미국 10년물 국채 금리는 2007년 이후 처음으로 5%를 돌파했고, 영국은 8월 물가가 3.1%로 뛰면서 30년물 금리가 1998년 이후 최고치를 경신했죠.
여기에 이상한 신호 하나가 더해지죠. 원래 유가와 금리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게 보통인데, BMO 캐피털마켓 집계로 WTI(서부 텍사스산 원유) 유가와 미국 10년물 금리의 1개월 상관관계가 0.96까지 올라갔어요. 유가 상승 → 물가 기대 확대 → 금리 상승이라는 스태그플레이션의 경로가 그대로 가격에 새겨지고 있다는 뜻이죠.
주식 시장 안에서도 자금이 갈리고 있어요. 국내에서는 하나금융지주와 신한지주 같은 은행주가 52주 신고가를 경신한 반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같은 반도체 대장주는 큰 폭의 조정을 받았어요. 뱅크오브아메리카 펀드매니저 조사에서도 '채권 금리의 무질서한 상승'이 그동안 1위였던 AI 거품 우려를 제치고 최대 테일 리스크로 올라섰죠. 스태그플레이션에서는 좋은 종목을 고르는 것보다 자산의 종류를 다시 고르는 게 먼저라는 걸, 시장이 먼저 보여주고 있어요.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봐야 할까
변수는 충격의 크기보다 지속 기간이에요. 골드만삭스는 물가가 목표를 넘긴 상당 부분을 관세와 에너지 같은 일시적 요인으로 보고 있지만, 호르무즈 해협의 통항 불안은 이미 반년을 넘겼어요. 국내 체감도 커지는데, 수출 물가는 전년 대비 42% 넘게 올랐고 한국은행은 전쟁이 길어질 경우 내년 성장률이 2.6%에 그칠 것으로 내다봤어요. 이창용 총재는 지난 4월 '최악의 경우 스태그플레이션 가능성을 부정하기 어렵다'고까지 말했죠.
핵심은 기대심리예요. 미시간대 조사에서 미국 소비자의 1년 기대인플레이션은 한 달 만에 4.0%에서 4.6%로 뛰었거든요. 물가가 계속 오를 거라는 믿음이 굳으면 임금 인상 요구가 따라오고, 그게 다시 물가를 미는 임금-물가 나선의 입구가 됩니다. 연준이 3년 만에 금리를 올리고, 점도표(Dot Plot)*에서 위원 18명 가운데 16명이 연말 금리를 지금보다 높게 잡은 것도 기대가 굳기 전에 신뢰부터 세우려는 계산으로 풀이돼요.
*점도표(Dot Plot)는 연준 위원들이 향후 각 연도의 적정 금리를 점으로 표시해 제출하는 전망표다. 점의 위치가 향후 긴축 속도를 가늠하는 실마리가 된다.
그리고 중앙은행의 한계도 함께 봐야 해요. 이란 국회의장은 '기준금리 25bp(0.25%포인트)로는 해협 같은 병목을 열 수 없다'며 연준을 조롱했는데, 금리가 원유를 더 뽑아주지 못한다는 건 사실이에요. 케빈 워시 연준 의장도 석유 가격 자체는 통제할 수 없다며, 연준의 역할은 충격이 다른 물가로 번지지 않게 막는 것이라고 선을 그었죠. 그러니 지금의 금리 인상은 물가와의 전면전이라기보다 기대심리 방어전에 가깝습니다.
이 국면의 자산 배분 교과서는 1970년대가 먼저 써놨어요. 당시 금은 실질 연 9% 안팎의 수익으로 물가를 이겼고 원자재 지수는 586% 올랐지만, S&P 500은 실질 가치가 10년간 절반가량 증발했죠. 기업 이익은 늘었는데도 물가가 주가수익비율을 상쇄한 결과예요. 오늘의 언어로 옮기면 물가를 그대로 반영하는 실물 자산(에너지·금·구리), 금리 등락에 덜 흔들리는 단기채, 원가 상승을 판매가로 넘길 수 있는 가격결정력 있는 기업이 그 축이 돼요.
스태그플레이션의 진행 여부를 가장 솔직하게 보여주는 계기판은 호르무즈 해협의 통항 물량과 미국 디젤 가격이에요. 지금이 1970년대의 재현인지 가벼운 버전에 그칠지, 이 두 숫자가 몇 달 더 버티는지가 답을 정해줄 텐데, 그 흐름을 지켜보는 게 실속 있는 대응일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