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보드 클릭 한 번에 60조원이 '복사'되다
국내 2위 가상자산 거래소 빗썸에서 직원의 키보드 입력 실수 하나로 약 60조원 상당의 비트코인이 마치 복사되듯 생성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지난 6일, 빗썸은 자체 이벤트 당첨자 695명에게 각 2천원씩 총 62만원을 지급하려던 중, 화폐 단위를 '원'이 아닌 '비트코인(BTC)'으로 잘못 설정하는 바람에 62만 개의 비트코인을 오지급한 겁니다. 당시 비트코인 1개 가격이 약 9,800만원이었음을 감안하면, 실수로 풀려난 자산의 규모는 어마어마한 수준이었죠. 문제는 빗썸이 실제 보유하고 있던 비트코인은 4만 2천여 개에 불과했다는 점입니다. 결국 존재하지도 않는 '유령 비트코인'이 장부상으로만 60조원어치나 생성된 셈입니다.
이 오지급 사실이 알려지자 빗썸 내 비트코인 가격은 5분 만에 약 17% 급락하는 혼란을 겪었습니다. 일부 이용자들은 갑자기 생긴 막대한 비트코인을 매도해 수십억 원의 이익을 실현하기도 했고, 반면 예상치 못한 가격 폭락으로 손실을 본 투자자들도 발생했습니다. 빗썸은 사고 발생 약 20분 후에야 문제를 인지하고 거래 및 출금을 전면 중단했지만, 이미 1,788개의 비트코인이 시장에 유출된 상태였습니다. 회사는 오지급된 비트코인의 99.7%를 장부상에서 회수했으나, 약 110억원 상당의 125개 비트코인은 아직 회수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허술한 내부통제와 '장부 거래'의 구조적 허점
이번 사태의 근본 원인은 가상자산 거래소의 고유한 거래 방식과 빗썸의 미비한 내부 통제 시스템에 있습니다. 빗썸을 포함한 대부분의 중앙화 거래소는 '장부 거래' 방식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이용자 간 거래가 발생하면, 실제 블록체인 네트워크상에서 코인이 이동하기 전에 먼저 거래소 자체 장부의 숫자만 변경하는 방식이죠. 이는 거래 속도를 높이고 편의성을 제공하지만, 실제 보유 자산과 장부 기록을 실시간으로 검증하지 않으면 이번처럼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자산이 마치 있는 것처럼 거래될 수 있는 치명적 허점을 안고 있습니다.
금융당국과 업계 전문가들은 이번 사고가 단순한 직원의 단위 입력 실수를 넘어, 내부 통제의 기본조차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고 지적합니다. 수천 원의 이벤트 당첨금을 지급하는 과정에서도 다중 확인이나 결재 절차 같은 기본적인 안전장치가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은행이나 증권사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더불어민주당 김지호 대변인은 "가상자산거래소의 내부통제 및 장부 관리 시스템의 구조적 허점을 드러낸 사건"이라고 규정했으며,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도 "존재하지 않는 코인을 판매해 뱅크런과 시장 붕괴를 초래할 수 있다"며 시스템의 심각성을 경고했습니다.
금융당국의 총괄 점검과 제도 보완의 시작
사고 직후 금융당국의 움직임은 신속했습니다. 이억원 금융위원장 주재로 긴급 회의가 소집되었고, 빗썸뿐만 아니라 모든 가상자산 거래소를 대상으로 내부 통제 시스템 전반에 대한 점검에 착수했습니다. 점검의 초점은 가상자산 지급 시 장부와 실제 보유 자산 간의 검증 체계, 다중 확인 절차, 인적 오류 방지 장치 등이 제대로 구축되어 있는지 여부입니다. 당국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가상자산 거래소에 금융회사 수준의 내부통제 기준 마련을 의무화하는 법적 장치를 강화하겠다는 방침을 분명히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추진 중인 '가상자산 2단계법'을 통해 거래소가 외부 기관으로부터 주기적인 자산 보유 현황 점검을 받도록 하고, 전산 사고로 이용자 피해가 발생할 경우 사업자의 무과실 책임을 규정하는 방안 등이 검토되고 있습니다. 또한, 거래소 대주주의 의결권 지분을 15~20%로 제한해 지나친 경영 간섭과 이로 인한 공적 책임 소홀을 방지하려는 논의도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한편, 빗썸은 피해를 본 고객에게 강제 매도로 인한 손실액의 110%를 보상하고, 1,000억원 규모의 고객 보호 펀드를 조성하겠다는 복구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일부 피해자들은 이미 빗썸으로부터 받은 비트코인 50개를 매도해 약 46억원을 확보하는 등 사태의 파장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이번 사건은 천만 명에 육박하는 국내 가상자산 투자자들에게 시장의 안전성에 대한 경종을 울리며, 디지털 자산 시장이 성숙하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제도적 인프라' 구축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