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유가는 뛰는데, 주유소는 내리는 까닭은
중동의 지정학적 리스크가 국제 유가를 끌어올리고 있습니다. 미국과 이란 간 무력 충돌이 격화되면서 호르무즈 해협 통항이 제한되고, 예멘 후티 반군이 바브엘만데브 해협 우회로까지 봉쇄하면서 공급 불안이 극대화되었습니다. 이 여파로 서부텍사스산원유는 배럴당 100.05달러, 브렌트유는 104.61달러를 기록하며 4개월 만에 최고치를 새로 찍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운전자들이 주유소에서 마주한 풍경은 정반대였습니다. 한국석유공사 오피넷 집계 결과 9월 둘째 주 전국 보통휘발유 평균 판매가격은 리터당 1,859.1원으로 전주보다 소폭 내렸고, 대전·세종·충남 등지에서도 휘발유와 경유 가격이 일제히 하락세를 보였는데요. 국제 시장에서는 유가가 폭등하는데, 국내 주유소 펌프 가격은 17주 연속으로 내리고 있는 이례적인 흐름이 이어지고 있는 겁니다. 이런 괴리가 가능한 건 정부가 시행 중인 석유제품 최고가격제 때문입니다. 정부가 휘발유 리터당 1,784원, 경유 1,773원 등으로 판매 상한선을 정해 두면서 국제 유가 상승분이 국내 가격에 즉각 반영되지 않고 억제되고 있습니다.
최고가격 동결의 그림자
현재 상황이 계속되면 정부의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국내 정유사 판매가격의 기준이 되는 싱가포르 도매가격이 최근 급등하면서, 휘발유 추정 원가는 리터당 1,842.87원, 경유는 2,011.47원으로 집계됐습니다. 이미 설정된 최고가격을 크게 웃도는 수준인데요.
이재명 대통령은 SNS를 통해 정제유 가격 안정을 공언하면서 유가 동결 기조를 분명히 했습니다. 정유사들이 호황을 누리고 있고 정부가 손실을 보전하고 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취지입니다. 하지만 동결을 유지할 경우 정부가 떠안아야 할 세금 보전 규모가 불어나면서 재정 부담이 가중될 수 있습니다. 거기다 유류를 많이 쓰는 사람일수록 보전 혜택이 크게 돌아가는 구조라 형평성 논란도 피하기 어렵습니다. 친환경차 보급에도 제동이 걸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석유 최고가격 동결이 단기적으로는 운전자들의 부담을 덜어주지만, 그 이면에는 재정 건전성과 에너지 정책 전환 사이의 딜레마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10차 고시를 앞두고 변수는
이제 시장의 시선은 오는 22일에 고시될 제10차 석유 최고가격에 쏠려 있습니다. 현재의 추정 원가와 국제 유가 추이를 볼 때 인상 압력은 상당한 상황입니다. 다만 정부가 유지에 나설 경우 단기적인 가격 급등은 제한적일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중동 리스크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장담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호르무즈와 바브엘만데브 해협을 둘러싼 긴장이 장기화된다면 국제 유가 상승세도 쉽게 꺾이지 않을 겁니다. 이달 말 발표될 10차 최고가격 고시 결과는 앞으로 국내 유가 흐름을 가르는 중요한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정부는 안정적인 서민 생활 지원과 재정 건전성 사이에서 어떤 균형점을 찾을지 주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