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년째 같은 결의, 달라진 숫자
지난 10월 28일 유엔 총회가 미국의 대쿠바 경제·무역·금융 제재 해제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습니다. 찬성 130표, 반대 17표, 기권 25표입니다. 1992년부터 매년 반복된 34번째 결의인데요. 문제는 방향이 아니라 숫자입니다. 지난해 찬성 165표에서 35표가 빠지면서 20년 만에 가장 낮은 지지율을 기록했습니다.
독일과 이탈리아, 한국 등이 기존 찬성에서 기권으로 돌아섰고 미국과 이스라엘은 반대로 맞섰습니다. 로이터통신은 표결 직전 미국 정부가 각국에 반대나 기권을 요청하는 외교 활동을 벌였다고 전했습니다. 다만 이 결의안은 법적 구속력이 없어 미국이 제재를 곧바로 풀 의무는 없습니다.
연단에서 터진 충돌, 그리고 추방
표결을 하루 앞둔 27일에는 이례적인 장면이 나왔습니다. 마이크 왈츠 미국 대사가 쿠바 정권의 억압과 부패를 비판하자 브루노 로드리게스 쿠바 외무장관이 탁자를 두드리며 항의한 겁니다. 왈츠 대사가 "여긴 미국이다"라고 맞받자 쿠바 대표단이 "거짓말쟁이"라고 외쳤고, 쿠바 서기관이 미국 외교관의 휴대전화를 손으로 쳐내는 장면까지 포착됐습니다.
미국은 이를 폭행 시도로 규정하고 리차드 투르 데 라 콘셉시온 1등 서기관을 추방했습니다.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이 추방 서류에 서명했고, 왈츠 대사는 "미국에서 미국인에게 손을 대면 대가가 따른다"고 밝혔습니다. 반대로 쿠바는 미국 외교관이 개인 공간을 침범해 촬영했다며 유엔 사무총장실에 항의 서한을 보냈습니다.
제재의 무게와 러시아의 계산
쿠바가 제출한 보고서를 보면 2025년 3월부터 2026년 2월까지 손실은 8억8300만 달러로 1년 전보다 7% 늘었습니다. 60여 년간 누적 손실은 1787억 달러에 이릅니다. 연료와 의약품 부족이 이어지고 대규모 이민 사태까지 겹쳤다는 게 쿠바 측 설명인데요. 미국은 반대로 쿠바의 경제 위기가 자국 정책 실패에서 비롯됐다고 맞서고 있습니다.
러시아는 이 틈을 비집고 있습니다. 러시아는 쿠바에 원유를 공급하는 사실상 유일한 국가로, 지난 3월 아나톨리 콜로드킨호가 마탄시스항에 73만 배럴을 내렸습니다. 러시아 외무부는 29일 성명에서 쿠바 지원을 계속하고 미국의 모든 제재를 완전하고 신속하게 해제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베트남도 제재의 무조건적 해제와 쿠바의 테러지원국 명단 제외를 촉구했습니다.
표결 구도 자체는 예년과 비슷했지만 찬성표가 흔들린 데다 외교관 추방까지 겹치면서, 유엔 안에서 쿠바를 둘러싼 판세가 조금씩 움직이는 모습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유세에서 쿠바에 대한 직접 행동 가능성을 거듭 언급한 만큼 긴장은 당분간 이어질 전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