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박 중인 유조선을 공격하다
중동의 긴장이 해상 물류의 핵심 거점까지 위협하는 수준으로 치달았습니다. 아랍에미리트 두바이 항구에 정박 중이던 쿠웨이트 국적 유조선 '알사미호'가 현지시간 31일 이란의 공격을 받아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선원들은 모두 안전하게 대피했고, 다행히 대규모 원유 유출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200만 배럴의 원유를 가득 실은 유조선이 공격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쿠웨이트 당국은 이 공격을 이란의 '직접적이고 악의적인 행위'로 규탄하며, 자국 방공 시스템이 추가적인 미사일과 드론 공격에 대응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이 공격은 이란-이스라엘 전쟁이 개전된 지 한 달이 넘도록 지속되는 가운데, 전쟁이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확전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사실 이번 유조선 피격은 갑작스러운 사건이라기보다 누적된 긴장의 결과입니다. 전쟁이 5주째 접어들며 예멘의 친이란 성향 후티 반군까지 참전을 선언했고, 이들은 이스라엘을 향해 미사일을 발사했습니다. 이로 인해 원유 수송의 또 다른 요충지인 홍해와 바브엘만데브 해협의 안전에도 적신호가 켜졌습니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과의 합의가 불발될 경우 주요 시설을 '초토화'하겠다는 강경 발언까지 내놓은 상태입니다. 이러한 복합적인 요인들이 중동 지역 전체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유가 폭등과 세계 경제의 진동
이러한 지정학적 리스크는 국제 유가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미국 서부텍사스산원유(WTI) 가격은 2022년 이후 처음으로 배럴당 100달러를 돌파했고, 30일 종가는 102.88달러를 기록했습니다. 브렌트유 역시 112달러 선까지 치솟았는데요. 더욱 주목할 점은 상승의 강도입니다. 브렌트유는 3월 한 달 동안 약 55% 폭등하며, 1988년 선물 계약 도입 이후 사상 최대 월간 상승률을 기록했습니다. 이는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촉발된 '3차 오일 쇼크' 당시의 상승폭을 넘어서는 수치입니다.
고유가는 세계 경제 전반에 걸쳐 파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중동 전쟁이 장기화될 경우 에너지와 식품 가격 상승으로 인플레이션이 재점화되고 경제 성장이 둔화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역시 올해 G20 국가의 평균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을 4.0%로 상향 조정했죠. 유럽은 겨울철 가스 및 전력 가격 급등이 예상되며, 특히 이탈리아와 영국처럼 가스 화력 발전 의존도가 높은 국가들이 취약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옵니다.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한국과 유로존의 성장률 전망치는 하향 조정되는 등, 직접적인 충격이 예상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려는 금융시장으로도 이어졌습니다. 아시아 증시는 중동 발 불안감과 미국 증시의 하락 여파로 큰 폭의 조정을 받았습니다. 일본 닛케이 지수와 한국 코스피지수가 동반 하락했죠. 미국에서는 기술주를 중심으로 한 나스닥 지수가 하락하며, 유가 급등이 인플레이션을 부추겨 연준의 금리 인하 시기를 더욱 늦출 수 있다는 관측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공급망 재편과 불확실한 전망
현재의 위기는 단순한 유가 상승을 넘어 글로벌 공급망의 취약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국내 수출입은행은 중동발 충격으로 정유, 석유화학, 자동차, 반도체 등 주력 제조업 전반에 조업 차질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정유업계는 원유 도입 중단과 운송비 폭등으로, 석화업계는 원료 공급 단절과 중국발 과잉 공급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산업의 쌀'이라 불리는 나프타 공급에 문제가 생기면 플라스틱, 합성수지 등 다양한 산업의 생산 라인이 멈출 수 있는 상황입니다.
가장 큰 불안 요소는 호르무즈 해협의 운명입니다. 이란 의회는 이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에 통행료를 부과하는 법안을 승인했고, 미국 등 제재 동참국 선박의 통과를 금지하는 내용도 포함했습니다. JP모건체이스는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한 달 더 지속될 경우 유가가 배럴당 150달러까지 상승할 수 있다는 극단적인 전망까지 내놓았습니다. 미국과 G7은 에너지 시장 안정화를 위해 모든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히며 호르무즈 해협 통제권 회복을 시사하고 있지만, 상황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의 전망은 미국의 추가적인 군사 행동, 특히 지상군 투입 여부에 크게 좌우될 것입니다. 전문가들은 지상군 투입이 전쟁을 장기화시키고 예측 불가능한 변수를 양산할 수 있어 가장 큰 리스크로 꼽습니다. 전쟁이 하루 빨리 종식되어 유가 충격이 완화되길 바라는 것이 전 세계 경제 관계자의 염원이지만, 현재로선 긴장의 고리가 풀릴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각국 정부와 기업은 공급망 다변화와 에너지 효율 제고 등 구조적 체질 개선을 서두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