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전쟁 속 위반 행위
미국 반도체 장비의 대표 기업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AMAT)가 중국 최대 파운드리 기업 SMIC에 대한 불법 수출 혐의로 미국 상무부와 2억 5천만 달러가 넘는 막대한 벌금 합의에 이르렀습니다. 이번 제재는 미국이 중국의 첨단 기술 역량 견제를 위해 강화한 수출 통제 정책을 위반한 데 따른 조치로, 단순한 법적 문제를 넘어 글로벌 공급망 재편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에 소재한 자회사가 우회 경로로 활용된 점이 주목받으며, 국제적 규제의 그물이 얼마나 촘촘해졌는지를 드러냈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2020년 미국 상무부 산하 산업안보국(BIS)이 국가 안보를 이유로 SMIC를 수출 통제 대상에 올리면서부터입니다. 이후 AMAT은 2021년부터 2022년까지 SMIC에 첨단 반도체 제조에 필수적인 이온주입 장비를 수출했습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미국 정부의 승인을 받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조사 결과, 총 56차례에 걸친 규정 위반이 확인되며, 1억 2,600만 달러 상당의 장비가 불법으로 흘러들어갔습니다.
한국을 경유한 우회 수출 방식
더욱 눈에 띄는 점은 이 불법 수출의 경로입니다. AMAT은 미국 본사에서 장비 부품을 한국의 자회사인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 코리아(AMK)로 보냈습니다. 한국에서 조립을 마친 장비는 최종적으로 중국 SMIC 공장으로 운반되었죠. 이러한 방식은 미국 정부의 직접적인 감시를 피하고, 허가 절차를 우회하기 위한 의도적인 행보로 해석됩니다. 미국 당국은 한국을 포함한 동맹국을 통한 간접 수출 경로에 대해서도 예외 없이 단속의 칼날을 빼들었음을 보여준 셈입니다.
이번 합의로 AMAT은 막대한 벌금을 납부해야 하지만, 조사는 종결됩니다. 회사는 수출 통제 준수 프로그램을 전면 재점검하고, 관련 직원과 경영진을 해고하는 등 내부 감시를 강화하기로 했습니다. 이번 사건은 AMAT 한 기업에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한국 메모리 반도체의 핵심 파트너인 미국 장비 기업들의 한국 자회사들은 이제 더욱 엄격한 수출 관리 시스템을 갖춰야 할 압박에 직면했습니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의 신호탄
이번 제재는 바이든 행정부가 시작한 대중국 첨단 기술 봉쇄 전략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미국은 자국 기술이 중국의 군사 및 첨단 산업 발전에 활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일본, 네덜란드와 함께 수출 통제 동맹을 구축해왔습니다. 이번에 한국 자회사가 연루된 사안은 동맹국 내의 공급망을 통한 '우회' 가능성까지 철저히 차단하려는 미국의 강력한 의지를 반영합니다. 향후 반도체 장비를 비롯한 핵심 물자의 흐름은 국가 안보와 지정학적 이해 관계에 따라 더욱 세분화되고 제한적인 방향으로 재편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결국 이번 벌금 사건은 한 기업의 규정 위반을 넘어, 첨단 기술 패권을 둘러싼 미중 간 경쟁이 기업의 일상적 영업 활동에까지 깊숙이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입니다. 글로벌 기업들은 더 이상 기술과 시장 논리만으로 사업을 영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복잡해진 국제 규제의 흐름을 정확히 읽고, 리스크를 관리하는 능력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시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