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자리, 두 곳으로 나뉘다
올해 역대 최고 수출 실적을 기록한 ‘무역의 날’ 기념식에 이재명 대통령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지난 61회 행사 중 대통령이 불참한 것은 단 4번에 불과한 만큼 이례적인 일이었죠. 대통령실은 한국무역협회의 초청에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았고, 재계 일각에서는 이 불참이 무역협회장에 대한 무언의 압박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윤진식 협회장이 이명박 정부의 인사이자 윤석열 대통령 캠프 출신이라는 점이 배경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무역협회 측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수출 증진을 위한 민관 협력의 중요성을 되짚어보는 계기가 되고 있죠.
반면 같은 날 오전, 청와대 영빈관에서는 또 다른 행사가 열렸습니다. 이 대통령이 직접 산업 역군 90여 명을 초청해 오찬을 함께 한 겁니다. 포항제철 1고로의 첫 쇳물을 만든 노동자부터 국산차 ‘포니’의 개발 주역, 구로공단 1세대 여성 노동자, 파독 광부와 간호사까지. 대한민국 산업화 역사를 직접 살아온 이들을 한자리에 모아 감사의 뜻을 전하는 자리였습니다.
“여러분이 진정한 영웅입니다”
오찬 자리에서 이 대통령은 “여러분이 이 나라를 위대하게 만든 영웅”이라고 치하했습니다. 특히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소년공으로 미싱 시다(실을 끼우는 일)를 했던 경험을 언급하며 현장 노동자들의 어려움에 깊이 공감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는 “소 팔고 밭 팔아 자식 교육 시킨 부모 세대의 희생 덕에 과학기술 강국이 될 수 있었다”며 경제 성장의 근간에는 국민의 땀과 헌신이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경제력이 민주주의와 문화의 토대가 된다는 그의 발언은 산업 역량에 대한 국가적 자부심과 더불어 현 정부의 경제 중심 가치관을 드러내는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환한 미소 뒤에는 무거운 현실 인식도 함께했습니다. 이 대통령은 “일터에서 죽는 사람이 왜 이리 많냐”며 산업재해의 심각성을 직격으로 지적했습니다. 올해 3분기까지 산재 사망자 수가 전년보다 증가했고, 특히 50인 미만 소형 사업장에서의 사고가 늘고 있다는 점에 안타까움을 표시했습니다. 그는 “겁주고, 수사해도 잘 줄어들지 않는다”고 토로하며, 안전한 작업 환경을 만들기 위한 정부의 강력한 의지를 재차 밝혔습니다.
감사와 압박 사이에서
두 행사는 같은 날, 같은 정부의 수반에 의해 열렸지만 그 뉘앙스는 사뭇 다릅니다. 한쪽에서는 국가 경제의 중추 역할을 해온 산업 현장의 ‘인간’에게 감사와 존경을 표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수출 행정을 총괄하는 ‘기관’의 대표를 의도적으로 외면한 셈이죠. 재계에서는 대통령의 무역협회장 불참을 정치적 색채가 강한 인사에 대한 불편한 신호로 읽고 있습니다. 과거 정권과의 연관성이 협회장의 역할 수행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가 퍼지고 있는 겁니다.
무역협회는 이번 논란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글로벌 관세 전쟁 등 불확실성이 커지는 시기에 민관이 협력해야 할 이유는 오히려 더욱 명확해졌습니다. 수출이라는 국가적 과제 앞에서 정치적 편가름보다 실질적인 협력이 중요해지는 시점입니다. 산업 현장의 헌신을 치하하는 목소리와 수출 기관을 외면하는 태도 사이에서, 정부의 통상 정책에 대한 일관된 메시지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과제는 무엇인가
이 대통령은 오찬 자리에서 산업 역군들로부터 다양한 건의도 받았습니다. 기업의 지방 이전 지원, 부품 수리비 지원 확대, 산업 역사를 보존할 박물관 설립, 국제기능올림픽 유치 등이 제안됐죠. 이는 단순한 감사 이상으로 현장의 경험과 기술이 제도적으로 계승되고 보상받아야 한다는 요구로 읽힙니다. 대통령은 인공지능 시대에도 현장의 노하우가 경쟁력의 핵심이라고 언급하며 이들의 목소리에 공감했습니다.
한편, 다음 날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과의 면담에서 AI 인프라 협력을 논의할 예정인 이 대통령의 행보는 미래 산업을 준비하는 모습과 맞닿아 있습니다. 과거를 기리며 현재의 안전을 챙기고, 미래를 준비하겠다는 복합적인 메시지를 동시에 전하고 있는 셈입니다. 무역의 날 하루 동안 벌어진 두 가지 장면은 정부가 산업계와 어떻게 소통하고 협력해 나갈지에 대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