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담 하루 만에 뒤집힌 판
이란과 사우디, 파키스탄, 튀르키예 고위급 인사들이 테헤란에 모여 역내 평화와 안보 협력을 강화하자는 공동 성명을 내놓은 게 27일입니다. 그런데 그 바로 다음 날, 예멘 후티 반군이 사우디 수도 리야드의 국방부를 겨냥해 탄도미사일을 쐈다고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외교적 완화의 물꼬를 트려던 회담이 하루 만에 무력 충돌로 덮인 셈인데요.
후티 대변인 야히야 사리 준장은 나즈란 공항과 하미스 무샤이트 공군기지에도 미사일을 발사해 군용 수송기 두 대를 타격했다고 밝혔습니다. 동부 라스 타누라 정유시설에도 미사일을 쏘아 화재를 냈다는 주장도 이어졌죠. 사우디 당국은 리야드로 날아온 미사일 두 발을 요격했다고 발표했지만, 구체적인 피해 규모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유가를 다시 흔든 라스 타누라
시장이 즉각 반응한 곳은 원유입니다. 후티의 공격 소식이 전해지면서 브렌트유는 배럴당 114.68달러, 서부텍사스산원유(WTI)는 101.32달러까지 올라섰습니다. 라스 타누라는 하루 약 55만 배럴을 처리하는 사우디 핵심 석유시설이자 원유 수출 인프라가 몰려 있는 요충지라, 공급망 불안 심리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던 겁니다.
여기에 정치적 변수까지 겹쳤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27일 텍사스 유세에서 이란과의 전쟁이 조건에 따라 끝날 것이라며 핵무기 보유 여부를 전제조건으로 내걸었고, 이스라엘 총선에서는 네타냐후 진영과 야권 모두 과반 확보에 실패하면서 연립정부 협상이 길어질 전망입니다. 대이란 정책의 방향이 흔들리면 유가의 지정학적 위험 프리미엄도 쉽게 가라앉기 어렵다는 관측이 나옵니다.
확산되는 충돌의 그림자
충돌은 이미 예멘 안쪽으로 번졌습니다. 사우디가 예멘 북부 알자우프의 알하즘 시장과 인근 주유소를 공습해 민간인 최소 14명이 숨지고 10명이 다쳤다는 보도가 나왔는데요. 사우디 측은 아직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았습니다. 같은 날 이집트 의회는 사우디가 요청할 경우 방어를 지원하는 조치를 승인했고, 후티는 이를 적대 행위로 규정하며 반발했습니다.
호르무즈 해협의 긴장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란은 기뢰와 충돌한 유조선이 불에 탔다고 알리며 해협이 여전히 봉쇄 상태라고 주장했고, 미군이 기뢰를 제거해 통항이 가능하다는 발표에는 반박하고 나섰죠. 전문가들은 사우디가 막대한 국방 예산과 첨단 무기를 갖추고도 후티에 밀리는 배경으로 왕실의 군 통제, 실전 경험 부족, 미국 안보우산 의존 같은 구조적 한계를 꼽습니다. 회담으로 만들어낸 완화의 실마리가 군사 충돌로 다시 끊기면서, 예멘이 역내 국가 간 대립의 진앙으로 떠오르는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