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바꾼 17세의 한 번의 시기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에서 한국 스노보드에 역사가 새로 써졌습니다. 만 17세 3개월의 최가온 선수가 여자 하프파이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는데요. 이는 한국 설상(雪上) 종목 사상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금메달은 평범한 우승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1차 시기에서 심한 낙상으로 무릎을 다치고, 2차 시기에서도 실패하며 12명 중 11위로 밀렸던 선수가, 마지막 3차 시기에 모든 것을 걸어 완벽한 연기를 선보이며 극적인 역전극을 쓰고 나온 것이죠. 결승 직전까지 기권 논의가 나올 정도였던 부상 속에서 피날레를 장식한 이 승리는, 단순한 스포츠 기록 이상의 의미를 지녔습니다.
이번 우승은 특히 미국의 전설 클로이 김을 제치고 이뤄낸 값진 성과였습니다. 클로이 김이 1차 시기에서 최고 난도 기술인 '더블 코크 1080'을 성공시키며 압도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이후 시기에서의 실수가 발목을 잡았습니다. 미국 언론에서는 채점을 둘러싼 작은 논의가 있었지만, 클로이 김 본인은 최가온의 우승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뛰어난 스포츠맨십을 보여주었습니다. 경기 후 최가온을 따뜻하게 안아주며 격려하는 클로이 김의 모습은, 치열한 경쟁 너머 존중과 우정이 존재하는 올림픽 정신을 보여주는 감동적인 장면이었습니다.
클로이 김을 놓친 아쉬움이 만든 시스템
최가온의 금메달 뒤에는 한국 스노보드 협회와 후원 기업의 체계적인 시스템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사실 한국 스노보드계에는 '클로이 김'이라는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한국계 미국인인 그를 국내에서 키우지 못하고 미국으로 보내야 했던 과거의 아쉬움이 있었죠. 이러한 반면교사는 대한스키·스노보드협회와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으로 하여금 유망주 조기 발굴과 지원 시스템 구축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신동빈 회장은 협회장으로 취임하며 해외 전지훈련, 국제대회 출전 지원, 부상 관리 프로그램 등 종합적인 지원 체계를 마련했습니다.
여기에 CJ그룹의 '꿈지기 철학'이 합쳐졌습니다. CJ는 2023년부터 최가온을 개인 후원하기 시작했는데, 2024년 그가 허리 골절 부상을 당했을 때도 지원을 끊지 않았습니다. 단기적인 성적보다 선수의 장기적인 성장 가능성을 믿고 투자하는 이 철학이, 최가온이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하여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결실을 맺을 수 있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롯데와 CJ의 지원은 단순한 자금 투자가 아니라, 선수가 오롯이 경기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준 시스템의 승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를 연 '영파워'의 출현
최가온의 금메달은 한국 동계 스포츠 지형도를 바꿔놓는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이번 올림픽에서 한국이 획득한 메달 4개 중 3개가 10대 선수들(최가온, 유승은, 임종언)에 의해 만들어지며, '영파워'의 위력을 확인시켰습니다. 특히 쇼트트랙에서 동메달을 딴 임종언 선수(18세)는 최가온의 금메달 소식을 듣고 큰 자극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동생이지만 배울 점이 많다"며, 자신의 주종목인 1500m에서도 금메달을 따겠다는 각오를 다졌습니다. 한 선수의 성공이 동료 선수들에게 긍정적인 동기 부여가 되고, 이들이 다시 새로운 성과로 이어지는 선순환이 시작된 것이죠.
이번 대회에서 스노보드는 남자 평행대회전(김상겸-은), 여자 빅에어(유승은-동), 여자 하프파이프(최가온-금)에서 메달을 휩쓰는 등 명실상부 '효자 종목'으로 떠올랐습니다. 이는 협회와 기업의 전략적인 투자가 구체적인 성과로 이어진 사례입니다. 최가온의 금메달은 하나의 우승을 넘어, 한국 동계 스포츠가 빙상 중심에서 설상 종목으로도 도약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보인 의미 있는 시작점이 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