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AI 시대의 전력을 원전에서 찾다
미국이 인공지능(AI) 시대를 대비해 원자력 발전 확대에 전면적으로 나서고 있습니다.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부 장관은 한국과 일본이 약속한 총 7500억 달러(약 1102조원) 규모의 대미 투자금을 원전 건설에 우선적으로 사용하겠다고 공식 발표했습니다. 이는 트럼프 행정부가 제시한 ‘원전 르네상스’ 구상의 일환으로, 2030년까지 대형 원전 10기 건설을 시작하고, 2050년까지 원전 용량을 현재의 4배 수준인 400GW로 늘리겠다는 야심찬 목표와 연결됩니다. AI 데이터센터의 폭발적인 전력 수요를 감당할 안정적인 기저전원으로 원전을 재조명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움직임은 과거의 트라우마를 딛고 나아가는 모습입니다. 1979년 스리마일섬 원전 사고 이후 신규 건설이 사실상 중단됐던 미국이, 이제는 같은 스리마일섬 1호기를 2027년 재가동하기로 한 결정이 상징적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향후 20년간 이 원전의 전력을 독점 구매하기로 한 것도, AI 산업이 원전의 경제성을 다시 살려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신규 건설보다 기존 원전 재가동이 비용과 시간 면에서 효율적이라는 판단 아래, 미시간주의 팰리세이즈 원전 등 다른 폐쇄된 원전들도 같은 길을 따를 가능성이 큽니다.
세계적 흐름과 대비되는 한국의 고민
미국의 적극적인 행보는 전 세계적인 추세와 맞닿아 있습니다. 영국과 중국은 신규 원전 건설을 계속 추진 중이며, 탈원전을 선언했던 스웨덴과 벨기에는 정책을 전환해 원전 수명 연장과 신규 지원에 나섰습니다. 후쿠시마 사고의 상처가 깊은 일본마저 전력난과 경제적 부담을 이유로 원전 재가동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에너지 안보와 AI 시대의 전력 수요라는 현실적인 도전 앞에서, 많은 국가들이 원전을 필수적인 선택지로 다시 바라보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상황은 이와 뚜렷한 대비를 보입니다. 미국의 대규모 원전 투자 발표 직후 국내 원전 관련주가 급등하는 모습에서 알 수 있듯, 한국은 세계적인 원전 기술력을 보유한 ‘수출 강국’입니다. 세계 최초로 스마트 원자로 실시설계 승인을 받는 등 설계와 건설, 운영 전 분야에서 경쟁력을 인정받아 왔습니다. 때문에 미국의 원전 확대 정책은 한국 기업들에게는 새로운 기회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문제는 국내 정책입니다. 이재명 정부는 신규 원전 건설을 사실상 중단한 상태입니다. 기후에너지환경부는 신규 원전 및 소형모듈원자로(SMR) 건설에 대해 ‘공론화를 통해 결정할 일’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원자력 추진 잠수함(원잠) 건설에는 적극적이지만, 상업용 원전에 대해서는 입장 정리가 미흡하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결국 원전 강국이라는 역량과 국내 에너지 정책의 방향성이 괴리되는 양상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신재생에너지만으로는 부족한 AI 시대의 전력
정부의 소극적 태도 뒤에는 원전 건설의 긴 기간, 적절한 부지 부족, 안전에 대한 국민적 우려 등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책의 근간이 되는 에너지 대전환, 즉 원전과 석탄을 단계적으로 줄이고 태양광과 풍력 등 재생에너지로 전환하겠다는 목표 자체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AI 데이터센터와 첨단 산업은 24시간 안정적으로 공급되는 ‘고품질 전력’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태양광과 풍력은 기상 조건에 따라 출력이 크게 변하는 ‘간헐성’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한 에너지저장장치(ESS)는 여전히 높은 비용과 화재 위험 등의 과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업계 관계자들과 전문가들은 신재생에너지만으로는 다가올 막대한 전력 수요 증가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지적합니다. 원전을 포기한 채 재생에너지 확대에만 매진하는 현재의 정책 기조가 일종의 ‘환상’에 불과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옵니다.
갈림길에 선 한국 에너지의 미래
현재 한국의 에너지 정책은 교차로에 서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세계적인 흐름과 기술적 역량,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전력 수요 증가라는 현실이 원전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탈원전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환경적 고려사항이 걸림돌로 작용합니다. 문제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에너지 정책의 기조가 흔들리며 장기적인 계획과 투자가 어려워진다는 점입니다.
AI 시대를 이끌 에너지 인프라를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는 국가 경쟁력을 좌우할 중대한 질문입니다. 미국이 동맹국의 자본을 끌어들여까지 원전 확대에 총력전을 펴는 모습은, 이 문제가 단순한 환경 논쟁을 넘어 경제와 안보의 핵심 사안으로 부상했음을 보여줍니다. 한국이 가진 원전 기술이라는 강력한 카드를 해외 수출에만 활용할 것인지, 아니면 국내 에너지 믹스의 안정적 한 축으로도 재편할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시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