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유럽의 관계가 뮌헨안보회의를 통해 다시 한번 주목받고 있다.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은 최근 열린 회의에서 ‘미국은 유럽의 자식’이라며 부드러운 톤으로 연설했지만, 메시지의 본질은 여전히 ‘미국 우선’이었다. EU는 이에 맞서 자체적인 가치를 내세우며 반박에 나섰고, 루비오 장관은 직후 슬로바키아와 헝가리를 방문해 동유럽에서의 영향력을 과시했다.
뮌헨에서의 ‘톤 다운’ 연설
지난해 뮌헨안보회의에서 JD 밴스 미국 부통령은 유럽을 향해 직설적인 비판을 쏟아냈다. 트럼프 행정부에 순응하라고 요구하며 대서양 동맹에 균열을 낸 그 연설은 유럽 지도자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올해 뮌헨에는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이 나섰다. 그의 연설은 예상과 달리 부드러웠다. **“미국은 유럽의 자식”**이라고까지 말하며 양측의 공통된 역사와 문화적 뿌리를 강조했고, “우리는 운명을 함께하는 동맹”이라고 덧붙였다.
유럽 측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은 “진정한 파트너”라고 칭찬했고, 독일의 아나레나 베어보크 외무장관도 “동맹의 중요성을 재확인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표면의 온화함 뒤에는 미국의 근본적인 입장 변화가 없었다는 분석이 빠르게 제기됐다. 폴리티코 등 외신들은 **“루비오 장관의 말은 따뜻했지만 메시지는 변함없었다”**고 지적했다. 즉, 미국은 여전히 유럽에게 트럼프 대통령의 구상에 맞춰 행동하거나 길을 비켜달라고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루비오 장관은 연설에서 “유럽이 대규모 이민에 대응해 문명을 지켜야 한다”는 등 미국의 국가안보전략과 동일한 시각을 드러냈다. 또한 미국의 외교 우선순위는 여전히 서반구, 인도·태평양, 유럽 순이라는 점도 분명히 했다. 핀란드 알렉산더 스투브 대통령은 “미국이 무엇을 원하는지 뚜렷하게 보여줬다”며 유럽이 미국의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경고했다.
EU의 반박과 자존심
미국의 ‘톤 다운’ 연설에 유럽이 안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EU 측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EU 외교안보 고위대표인 카야 칼라스는 뮌헨 무대에서 미국의 ‘유럽 소멸’ 경고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최근 발표한 국가안보전략 보고서는 유럽이 문명 소멸의 위기에 처해 있다고 주장했는데, 칼라스는 **“유럽은 뛰어난 생활 수준을 누리고 있으며, 번영과 자유의 세계적 기준을 제시한다”**고 맞섰다. 그녀는 “유럽 때리기(punching bag)가 특정 정치권에서 유행하고 있다”고 비꼬기도 했다.
칼라스는 미국이 유럽의 규제를 표현의 자유 억압이라고 비난한 데 대해서도 에스토니아의 언론 자유 지수를 들며 “미국보다 높다”고 반박했다. 이는 미국의 비판에 대한 유럽의 자존심 세우기로 해석된다.
우크라이나 문제에 대해서는 유럽의 입장이 여전히 신중했다. 칼라스는 우크라이나의 EU 가입 시기에 대해 “구체적인 날짜를 제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말했다. 한편 러시아와의 전쟁 종식을 위해서는 “러시아에 대한 압박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녀는 “러시아는 망가진 상태”라며, 전쟁 피해 배상과 전쟁범죄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EU는 미국의 비판에 굴하지 않고 자신들의 가치와 성과를 내세우며 독자적인 길을 걸어가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동유럽 방문의 숨은 의도
뮌헨 연설 직후 루비오 국무장관은 슬로바키아와 헝가리를 차례로 방문했다. 두 나라 모두 최근 친러시아 성향의 지도자가 집권해 EU에 반기를 든 국가들이다. 루비오의 방문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슬로바키아에서는 페테르 펠레그리니 대통령과 로베르트 피초 총리를 만났다. 피초 총리는 미국 기업 웨스팅하우스와 원전 건설 계약을 체결하고, F-16 전투기 4대를 추가 구매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루비오 장관은 “유럽이 미국에 의존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며 슬로바키아의 자립 노력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또한 “우리는 유럽에 속국이 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헝가리에서는 오르반 빅토르 총리와 회담을 가질 예정이다. 헝가리는 4월 총선을 앞두고 있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오르반 총리의 여당 피데스는 친유럽 성향의 야당 티서에 뒤지고 있는 상황이다. 루비오 장관의 방문이 총선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미국의 동유럽 방문은 단순한 친선 차원을 넘는다. EU 내부에서 미국에 우호적인 국가들을 지원함으로써 유럽 연합의 결속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가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특히 트럼프 행정부는 유럽의 통합에 회의적이고, 개별 국가와의 양자 관계를 중시해 왔다. 루비오 장관이 EU의 ‘문제아’로 꼽히는 두 나라를 먼저 찾은 것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유럽에서는 미국의 이러한 접근에 불안감을 표출하고 있다. 독일 외교관 한 명은 “미국이 유럽을 분열시키려 한다”며 우려를 나타냈다. 하지만 미국 측은 “동맹국과의 협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일 뿐”이라고 해명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의 관계는 여전히 긴장과 화해의 줄다리기가 계속될 전망이다. 뮌헨안보회의와 루비오 장관의 동유럽 방문은 그런 관계의 한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