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마이크를 놓지 않은 성우
성우 강희선이 7월 4일 새벽 지병으로 별세했습니다. 향년 65세였습니다. 고인은 서울과 부산 지하철 안내방송은 물론, 애니메이션 '짱구는 못말려'의 봉미선 역으로 수십 년간 대중의 일상에 곁을 둔 목소리의 주인공이었습니다. 2021년 대장암이 간으로 전이돼 시한부 2년 진단을 받았음에도 47번의 항암 치료를 견뎌냈고, 투병 중에도 녹음 작업을 이어간 성우였습니다.
1979년 TBC 성우극회 10기로 데뷔한 고인은 방송 통폐합 이후 KBS 15기 성우로 활동했습니다. '빨간 머리 앤', '모모노케 히메', '세일러 문' 등 다수의 애니메이션은 물론, 외화에서 샤론 스톤, 줄리아 로버츠, 니콜 키드먼의 목소리 연기도 맡았습니다. 1996년부터는 서울 지하철 18호선과 부산 지하철 14호선의 안내방송을 담당하며 도시의 발걸음에 늘 함께하는 존재가 됐습니다.
짱구 엄마로서 남긴 26년
1999년부터 26년간 '짱구는 못말려'의 봉미선 역을 맡으며 전 세대의 어린 시절과 성인 시대를 관통하는 친숙한 인물이 됐습니다. 투병 기간에도 성우로서의 책임을 놓지 않았는데요. 항암 치료를 받는 병실에서 지하철 안내방송을 녹음했다는 일화가 전해지며, 극장판 '짱구' 녹음을 위해 14시간 30분 동안 매진한 적도 있습니다. "성우라는 직업을 너무 사랑한다"는 고인의 말처럼, 암과 싸우는 와중에도 목소리 앞에 서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SNS를 통해 "고인의 목소리가 누군가에게는 하루를 여는 활기찬 신호이자 지친 하루 끝의 안도감이었다"며 애도의 뜻을 전했습니다.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 제작진은 "우리들의 영원한 짱구 엄마"라는 메시지를 남겼고, 후배 성우들과 팬들도 따뜻했던 선배의 마음을 오래 기억하겠다는 추모 글을 게재했습니다.
짱구 아빠에 이어 엄마까지
고인의 부고는 '짱구' 팬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습니다. '짱구 아빠' 신영식 역을 맡았던 성우 오세홍이 2015년 항암 치료 중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지 11년 만의 일입니다. 두 성우가 60대 초반에 모두 암으로 떠났다는 점은 작품에 대한 깊은 애정을 끝까지 지키려 했던 그들의 마지막 모습을 더욱 애틋하게 만듭니다.
고인은 2024년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해 "투병한 지 4년, 항암을 47번 받았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오늘이 항상 마지막"이라는 말로 직업을 사랑하는 마음을 드러내기도 했는데요.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31호실에 마련됐고, 발인은 7월 6일 오전 7시 40분, 장지는 용인공원 아너스톤으로 정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