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조 원이 풀리는 순간
AI 반도체 호황을 맞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올해 직원들에게 지급하는 금액이 어마어마한 수준입니다. 삼성전자는 1분기에만 5조 6천억 원이 넘는 급여를 지급했고, SK하이닉스 역시 4조 6천억 원 이상을 쏟아부었습니다. 양사 모두 영업이익의 10% 안팎을 성과급으로 돌려주기로 했으니, 시중에 유입될 자금 규모가 수십조 원에 이를 전망입니다. 이 정도 규모의 유동성 확대는 국가 전체의 소비와 투자 패턴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천문학적인 성과급은 단순히 반도체 업계 내부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한국은행이 분석한 IT 부문 특별급여는 전년 동기 대비 무려 60%나 급증했고, 이는 전체 시중 유동성을 확대하는 중요한 방아쇠가 되었습니다. 돈이 풀리면서 물가 상승 압력이 커졌고, 이는 곧 금리 인상 명분으로 이어졌습니다.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도 금리 인상 필요성을 언급했고, 미국 연준의 기준금리 전망치마저 상향 조정되는 상황입니다.
임금은 오르는데 물가도 뛰고
반도체 업계의 호황이 다른 산업의 노동자들을 자극한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입니다. 현대차, 기아, HD현대중공업, LG유플러스 등 주요 제조업과 통신업 노조들이 잇따라 영업이익이나 순이익의 30% 수준 성과급을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결국 한 기업군의 호황이 전 산업의 임금 기준선을 끌어올리는 효과를 낳으면서, 고용주와 노동자 모두에게 다른 형태의 부담을 안기고 있습니다. 특히 제조업 중심의 대형 사업장에서는 임금 협상의 기준이 반도체 업계로 빠르게 옮겨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임금 상승 압력이 대기업에 집중된다는 점입니다. 대기업은 버틸 여력이 있지만, 부실채권 비율이 높은 중소기업들에게 금리 인상은 직접적인 생존 위협이 됩니다. 대내외적 금리가 오르면 이자 부담이 가중되고, 중소기업의 자금줄이 말라버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한국은행의 금리 정책이 중소기업의 숨통을 조이는 딜레마에 빠진 셈이죠.
셔세권과 양극화의 딜레마
성과급을 받은 반도체 직원들이 몰려간 곳은 따로 있습니다. 사업장 셔틀버스가 다니는 이른바 셔세권이죠. 동탄과 안양 동안, 용인 수지 등지의 부동산 가격이 9% 넘게 급등했는데, 수억 원의 성과급과 무주택 직원 대상 저리 대출이 맞물리며 매수 수요를 폭발시켰습니다. 직원들의 실수요가 투기성 수요와 섞이면서 지역 주택 시장은 한때의 열기로 들끓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소득 불평등 심화라는 더 큰 그림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상위 10%의 소득 점유율이 16.5%까지 올라 2013년 이후 가장 높은 수준에 도달했고, SNS상의 성과급 인증 문화는 타 산업 종사자들의 상대적 박탈감을 키우고 있습니다. 정부는 장기보유특별공제 축소와 재산세 및 종합부동산세 인상을 포함한 세제 개편을 준비하며 부동산 불로소득 환수와 양극화 완화를 꾀하고 있지만, 이것이 과연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지는 두고 봐야 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