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개월 만에 찾아온 고환율 공포
원·달러 환율이 18일 장중 1480원을 넘어서며 8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습니다. 결국 이날 마감은 전일보다 1.5원 하락한 1,478.30원에 머물렀지만, 시장을 뒤흔든 건 단순한 숫자 이상의 불안감이었습니다. 고점을 찍은 환율은 수출기업의 실적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기존 인식과 달리, 이번에는 구조적 원화 약세에 대한 우려가 훨씬 컸습니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올해만 9조 원이 넘는 국내 주식을 순매도하며 자금을 빼내는 가운데, 서학개미의 해외 투자까지 더해져 달러에 대한 수요가 공급을 압도하는 ‘수급 쏠림’ 현상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국의 경계는 즉각적인 행동으로 이어졌습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는 이날 오전 금융당국 수장들과 긴급 점검회의를 열고 "외환시장 변동성 확대 가능성에 유의하라"며 24시간 감시 체계를 강화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미 전날부터 예고된 외환건전성 제도 개편안도 본격 시행에 들어갔는데요. 외국계은행에 적용되던 선물환포지션 비율 규제를 완화하고, 외화유동성 스트레스 테스트를 유예하는 등 당국이 ‘외화 유입’에 모든 초점을 맞춘 모습이었습니다.
기업 간담회부터 규제 완화까지 총력 대응
당국의 대응은 다각적으로 펼쳐졌습니다. 가장 눈에 띈 것은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이 삼성, 현대차, SK 등 7대 그룹 관계자들과 가진 간담회였습니다. 환율 불안이 기업의 투자와 생산 계획에 미치는 영향을 직접 듣고 대책을 점검하겠다는 취지였죠. 동시에 기획재정부는 외화 유동성을 늘리기 위한 실질적 조치들을 쏟아냈습니다. 수출기업이 국내에서 쓸 운전자금 목적으로도 외화대출을 받을 수 있게 허용 범위를 넓히고, 외국인 투자자들이 국내 증시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통합계좌를 활성화하는 방안이 포함됐습니다.
하지만 시장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당국의 적극적 발표에도 불구, 환율은 1,480원대를 위협하며 등락을 거듭했고, 주식시장은 코스피가 1.53% 하락하는 등 함께 출렁였습니다. 일각에선 이번 조치들이 단기적으로 달러 상승 심리를 누르는 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국민연금의 해외 투자 확대나 서학개미 열풍 같은 구조적인 자본 유출 흐름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지적이 나옵니다. 증권가에서는 외국인의 이탈 현상을 두고 ‘BYE 코리아’ 논의가 나오기도 했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분석이 대세였습니다.
누군 잃고 누군 얻는, 고환율의 양면
고환율의 영향은 업종에 따라 천차만별입니다. 해외 매출 비중이 90%가 넘는 크래프톤 같은 게임사에게는 호재로 작용합니다. 원화 가치가 하락하면 외화로 벌어들인 매출이 원화로 환산될 때 더 많은 이익이 발생하기 때문이죠. 반면, LG에너지솔루션, SK온 같은 배터리 3사는 고민이 깊어집니다. 미국 등 해외에 대규모 공장을 짓는 데 드는 원화 비용이 급증하고, 갖고 있는 외화 부채의 평가 손실 위험에 노출되기 때문입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물가와 가계 지갑으로 번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수입 원자재 가격이 오르면 결국 소비자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고, 해외 여행이나 해직 구매 비용은 바로 늘어납니다. 전문가들은 이번 흐름이 단순한 변동이 아닌 ‘뉴노멀(새로운 표준)’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한국투자증권은 내년 원/달러 환율의 연평균 전망치를 1420원으로 상향했고, 적정 범위를 1350원에서 1500원까지로 넓혔습니다. 당국의 강력한 의지 표현과 규제 완화가 시장의 불안 심리를 잠재우는 데 성공할지, 아니면 1500원 시대를 앞당기는 계기가 될지, 시장의 촉각은 여전히 곤두서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