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반기의 그림자, 하반기의 빛
삼성전자의 2025년은 상반기와 하반기가 극명하게 갈린 한 해였습니다. 올해 초까지 삼성전자는 반도체 부진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며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1분기 영업이익이 6조 7천억 원에 그쳤고, 2분기에는 4조 6천억 원으로 더욱 위축됐죠. 메모리와 파운드리 사업이 동시에 주춤했고, HBM 판매도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반기에 들어서며 국면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3분기에는 86조 원의 역대 최대 분기 매출을 기록하며 12조 원의 영업이익을 냈고, 4분기에는 영업이익이 19조 원에 달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반등의 중심에는 반도체, 그중에서도 HBM(고대역폭 메모리) 시장에서의 전략적 변화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한때 '애물단지'였던 HBM3E의 귀환
삼성전자의 HBM3E 12단 제품은 한때 시련의 아이콘이었습니다. 경쟁사인 SK하이닉스에 비해 성능과 수율에서 뒤처져, 엔비디아의 품질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며 주문을 잃는 상황이 반복됐죠. 하지만 올해 이 흐름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삼성전자는 D램 설계를 재정비하고, 핵심 파트너를 새롭게 확보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그 파트너는 바로 반도체 설계 전문 기업 브로드컴이었습니다.
브로드컴은 구글의 AI 반도체(TPU) 설계를 대행하는 회사입니다. 엔비디아와 달리 브로드컴은 고객사의 요구사항에 맞춰 칩을 설계하는 ‘디자인 하우스’ 역할을 하기 때문에, 메모리 공급업체에 대해 보다 유연한 접근을 취합니다. 삼성전자는 상대적으로 낮은 공급 단가를 제시하며 브로드컴과의 협력을 강화했고, 이를 통해 HBM3E 12단 제품의 공급 물량을 확대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결국 한때 난관이었던 제품이 새로운 동맹을 통해 재도약의 기회를 얻은 셈입니다.
AI 생태계 확장, 삼성에 새 기회를 열다
삼성전자에 유리한 흐름은 고객 구조의 변화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HBM 시장은 엔비디아와 AMD 같은 GPU 업체 중심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최근 구글, 아마존, 메타와 같은 빅테크 기업들이 자체 AI 반도체(ASIC) 개발을 가속화하면서 시장의 판도가 바뀌고 있습니다. KB증권에 따르면, GPU와 ASIC의 HBM 수요 비중이 내년에는 6대 4로, 2027년 이후에는 ASIC의 비중이 절반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됩니다.
이 변화는 삼성전자에게 절호의 기회입니다. 삼성은 내년 HBM 전체 생산 능력의 약 60%를 ASIC 업체에 할당할 계획으로 알려졌습니다. 특히 브로드컴에 대한 공급량은 올해보다 3배 가까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죠. 다변화된 고객 기반을 확보한다는 건, 특정 고객사의 변동성에 휘둘릴 위험을 줄이는 동시에 시장 점유율을 공고히 하는 길입니다. 증권가에서는 이 같은 흐름 덕분에 삼성전자의 내년 HBM 점유율이 올해보다 두 배 가까이 상승한 35% 수준에 이를 것으로 내다보고 있습니다.
내년을 향한 기대와 남은 과제
이러한 호재들이 모여 삼성전자에 대한 내년 실적 전망은 한층 밝아졌습니다. 일부 증권사는 반도체 ‘슈퍼 사이클’의 본격화를 예상하며, 삼성전자의 내년 영업이익이 100조 원에 육박할 수 있다고 전망합니다. 반도체(DS) 부문만 해도 77조 원에서 93조 원의 영업이익을 낼 것으로 예상되는데, HBM 4 시장 선점과 범용 D램 가격 상승이 주요 동력으로 꼽힙니다.
물론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가전(CE)과 TV 사업은 여전히 중국 업체들의 강력한 추격과 내수 부진으로 고전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스마트폰 시장에서는 애플의 점유율 확대가 삼성전자에게는 위협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죠. 노태문 사장이 이끄는 DX부문의 도전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입니다. AI 기술을 접목한 제품 혁신과 시장 공략으로 중국의 추격을 뿌리치고, 애플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되찾는 일이 남아있는 과제입니다.
삼성전자의 2025년은 어려움을 딛고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한 해였습니다. 상반기의 부진을 하반기의 반등으로 만회한 것은 단순한 실적 호전을 넘어, 시장 구조 변화에 발맞춘 전략적 전환이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이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HBM 시장에서 브로드컴과의 협력은 그 출발점에 서 있죠. 내년이면 이 파트너십이 어떤 결실을 맺을지, 그리고 그것이 삼성전자의 다음 도약으로 이어질지 주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