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조 원의 방어선, 5일 만에 무너지다
미국과 일본이 28년 만에 손을 잡고 벌인 대규모 엔화 방어전이 불과 5영업일 만에 절반가량 힘을 잃었습니다. 지난달 말 두 나라가 약 150조 원을 쏟아부은 끝에 달러당 155엔대까지 내려갔던 환율은 다시 159엔을 돌파하며 160엔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시장은 이번 개입이 일시적인 숨 고르기에 그쳤다는 평가를 내놓고 있습니다.
뉴욕 외환시장에서 엔/달러 환율은 장중 한때 159.36엔까지 오른 뒤 159.25엔에 거래를 마쳤는데요. 이는 개입 직후의 엔화 가치 상승분 가운데 상당 부분을 반납한 수치입니다. 원유 수입 의존도가 높은 일본으로서는 호르무즈 해협 불안으로 촉발된 유가 상승이 큰 부담으로 작용했고, 미국의 물가 상승 전망이 확산되면서 미국 장기 금리가 오르자 엔화 매도세는 더욱 거세졌습니다.
미국이 응한 이유, 일은행 총재의 한 마디
이번 공동 개입의 배경에는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의 발언이 결정적이었습니다. 그는 지난달 금융정책결정회의 후 기자회견에서 금리 인상 속도를 높일 수 있다는 뜻을 내비쳤는데요. 미국은 이를 9월 조기 금리 인상의 신호로 읽고 공동 개입에 응했습니다.
미국이 이렇게 빨리 움직인 데는 여러 계산이 깔려 있습니다. 8월 중에는 일본은행의 정책 회의가 열리지 않아 시장이 방어할 타이밍을 놓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고, 일본의 장기 금리 상승이 미 국채 금리를 끌어올려 자국 경기를 냉각시킬 수 있다는 점도 고려되었습니다. 여기에 중간선거를 앞둔 트럼프 행정부의 정치적 부담까지 겹치면서 조기 대응이 이루어진 것으로 풀이됩니다.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장관도 우에다 총재의 정책 판단에 강한 신뢰를 표명했습니다.
근본이 바뀌지 않으면 환율도 바뀌지 않는다
문제는 이런 외환 개입이 장기적인 엔화 가치 회복으로 이어지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시장 전문가들은 미·일 금리 격차나 일본의 확장 재정 기조 같은 펀더멘털이 그대로인 상황에서, 정부의 인위적 개입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기초 여건이 변하지 않으면 개입 효과는 반드시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다카이치 사나에 내각은 식료품 소비세 인하를 추진하며 민생 대응에 나서고 있지만, 이 역시 재정 부담을 키울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할 여지가 있습니다. 시장에서는 헤지펀드 등 단기 투자자들이 추가 개입이 없자 다시 엔화를 내다팔고 있으며, 일본의 무역수지 악화도 엔저 현상을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엔화의 운명을 가를 결정적 변수는 결국 오는 9월 17일부터 열리는 일본은행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