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경제의 지휘자가 떠나다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이 파킨슨병 합병증으로 향년 100세에 별세했습니다. 1987년부터 2006년까지 무려 18년 반 동안 연준을 이끈 그는 레이건에서 부시까지 네 명의 대통령을 거치며 현대 금융사에 가장 깊은 족적을 남긴 인물입니다.
뉴욕 맨해튼 출신인 그는 어린 시절 클라리넷과 색소폰에 재능을 보여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예술을 공부했으나, 이후 뉴욕대에서 경제학으로 진로를 바꿨습니다. 그의 부인인 안드레아 미첼 기자는 그를 미국 경제를 형성한 거인이자 실수를 인정할 줄 아는 정직한 사람으로 기렸습니다.
연준 역시 공식 성명을 통해 그의 리더십 아래 지속적인 물가 안정과 경제 성장을 달성했다고 평가했습니다. 그가 구축한 체계와 관행은 지금도 연준 내부에 남아 있다고 애도의 뜻을 전했습니다. 그의 통화정책은 한때 세계 금융시장의 나침반 역할을 했고, 그의 입에 오르내리는 말 한마디에 달러와 주식이 출렁일 만큼 막강한 영향력을 지녔습니다.
10년 호황과 위기의 안전판
그린스펀의 진가는 취임 직후 닥친 시험대에서 빛났습니다. 1987년 블랙 먼데이 당시 그는 신속하게 유동성을 공급하며 시장 붕괴를 막아냈고, 이후 1990년대 아시아 외환위기와 닷컴 버블, 9·11 테러 등 굵직한 위기마다 중앙은행의 안전판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특히 1991년부터 2001년까지 이어진 미국의 장기 호황은 그의 전성기로 꼽힙니다. 생산성 향상이 물가 상승을 억제할 것이라 판단한 그는 고성장과 낮은 실업률을 동시에 달성했으며, 이로 인해 마에스트로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1997년 외환위기 당시에는 뉴욕 연준을 통해 월가 은행들의 한국 단기 대출 만기 연장을 설득하며, 한국이 부도 위기를 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기도 했습니다.
업적 너머 남은 질문과 새로운 회귀
그러나 모든 영광 뒤에는 비판이 존재했습니다. 2000년대 초 지나친 저금리 기조와 금융시장에 대한 규제 완화가 주택 거품을 키웠고, 이것이 결국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단초가 되었다는 지적은 그의 유산에 영원한 물음표를 남겼습니다.
그는 퇴임 후 의회 청문회에서 은행들이 스스로를 규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했습니다. 자유시장에 대한 맹신이 오히려 더 큰 위험을 불렀다는 평가를 스스로 받아들인 셈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그의 별세 시점과 맞물려 케빈 워시 신임 연준 의장이 그린스펀 특유의 모호한 소통 방식을 되살리고 있다는 겁니다. 워시 의장은 정책 성명 분량을 줄이고 포워드 가이던스를 삭제하며 건설적 모호성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는 AI 혁명이라는 새로운 변화 속에서 그린스펀의 유산이 어떻게 재평가될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거장의 삶이 공과 과로 평가받듯, 그의 정책 유산 역시 시간 속에서 끊임없는 논쟁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