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도권을 두고 맞선 두 부처
한국과 미국 외교당국이 16일 처음으로 대북정책 공조 정례 협의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대북 정책의 주무 부처인 통일부는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는데요. 외교부가 주도하는 이 협의체의 성격과 방식에 대해 통일부가 선을 그은 겁니다. 이로 인해 정부 내에서 대북 정책을 누가 주도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논쟁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과거 문재인 정부 시절 운영됐던 '한미 워킹그룹'의 부정적 기억이 새로운 협의체 구성에 대한 거부감으로 이어지고 있죠.
외교부는 정연두 외교전략정보본부장과 케빈 김 주한미국대사대리를 수석대표로 한 '한미 정상회담 조인트 팩트시트 후속 협의'를 개최했습니다.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 이는 지난 한미 정상회담 합의 사항을 실행하기 위한 실무 협의의 성격을 강조합니다. 반면 통일부는 같은 날 오후 별도로 주한 외교단과 국제기구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명회를 열며 독자적인 행보를 이어갔습니다.
되살아난 '워킹그룹'의 그림자
통일부의 강한 거부감 뒤에는 2018년 출범해 2021년 폐지된 한미 워킹그룹에 대한 뼈아픈 경험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당시 워킹그룹은 대북 제재 이행과 남북 협력 사업을 조율한다는 명목으로 만들어졌지만, 실제 운영 과정에서 남북 교류의 발목을 잡는 장애물로 작용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입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9년 북한에 대한 타미플루 지원 문제였는데요. 제재 위반 가능성을 이유로 미국이 운송을 막으면서 지원이 무산된 적이 있습니다. 당시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은 이를 두고 '친미사대의 올가미'라고 비난하기도 했죠.
이런 경험 때문에 통일부와 진보 성향의 전직 장관들은 외교부 주도의 새로운 협의체가 '제2의 워킹그룹'이 될까 봐 깊이 우려하고 있습니다. 임동원, 정세현 전 장관을 비롯한 6명의 전직 통일부 장관은 공동 성명을 내고 "외교부에 대북정책을 맡길 수 없다"며 강력히 반발했습니다. 그들은 헌법과 정부조직법상 대북 정책의 주무 부처는 통일부라고 주장하며, 외교부 주도 협의는 원칙에 어긋난다고 지적했습니다.
'자주' 대 '동맹'의 오랜 프레임
이번 갈등은 단순한 부처 간 의견 차이를 넘어 이재명 정부 내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온 '자주파'와 '동맹파'의 이념적 접근 차이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자주파는 남북 관계를 한국이 주도적으로 풀어가야 한다는 입장이고, 동맹파는 미국과의 긴밀한 공조를 최우선으로 생각하죠. 통일부가 남북 대화와 교류 협력에 더 무게를 두는 반면, 외교부는 북핵 문제와 같은 국제적 안보 이슈와의 연계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대통령실은 이러한 갈등설을 공식적으로 부인합니다. 강유정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두 부처 간 의견 차이를 갈등으로 보기 어렵다고 설명했는데요. 북한과의 대화가 어려운 상황에서 다양한 해법을 모색하는 과정상 자연스러운 논의라는 입장입니다. 실제로 협의체의 공식 명칭이 '한미 대북정책 협의'에서 '정상회담 후속 협의'로 바뀐 것은 통일부의 우려를 일부 반영한 타협의 결과로 읽힙니다.
앞으로의 향방과 쟁점
첫 회의가 개최된 지금, 핵심은 이 협의체가 실제로 어떻게 운영될 것인가입니다. 외교부는 이번 협의가 과거 워킹그룹과는 성격이 다르며, 전략적 소통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명하고 있죠. 하지만 시민사회단체들도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자주통일평화연대 등은 이 협의체가 한국 정부의 대북 정책 자율성을 침해하고, 일방적인 대북 강경론만을 강화할 수 있다며 반대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향후 관전 포인트는 통일부의 참여 여부와 협의체의 실질적 역할입니다. 통일부 정동영 장관은 "내용을 보고 참여를 검토하겠다"며 조건부 입장을 밝혔습니다. 궁극적으로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통해 정부의 일관된 입장으로 조율될 것이지만, 과거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면서도 한미 간 긴밀한 공조를 이어가는 데 필요한 최적의 협의 방식에 대한 고민은 계속될 전망입니다.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와의 협의라는 변수 또한 이 방정식에 포함되어 있어, 정부의 고민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