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엔 환율 900원 붕괴, 극명한 대조가 나타나다
원·엔 재정환율이 100엔당 895원대까지 내려가며 1년 8개월 만에 900원 선이 무너졌습니다. 달러 기준으로는 엔화 가치가 1986년 이후 약 40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추락하는 가운데, 원화는 오히려 두 달여 만에 최저치인 1,460원대를 기록하며 강세를 보였습니다. 같은 아시아 통화라도 원화와 엔화는 이례적으로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셈입니다.
이런 극명한 대조는 최근 외환시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풍경입니다. 달러-엔 환율이 164엔에 육박하는 동안 달러-원은 1,550원대에서 1,460원대로 급락했는데요. 심지어 달러 인덱스가 3주 만에 최고치를 새로 쓴 상황에서도 원화는 위안화와 거의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며 강세를 이어갔습니다. 달러-원과 달러-위안의 상관계수가 0.67에 달한 반면, 달러-원과 달러-엔은 -0.61을 기록했으니 과거와는 전혀 다른 패턴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엔화 추락의 뒤엔 중동 리스크와 일본 경제 구조
엔화 약세의 가장 큰 견인차는 중동 지역의 지정학적 리스크입니다. 후티 반군의 유조선 공격과 트럼프 대통령의 대규모 보복 예고가 맞물리면서 브렌트유는 배럴당 100달러를 돌파했고, WTI도 93달러대까지 치솟았습니다.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일본은 유가 급등이 곧 무역적자 확대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에 엔화 매도가 집중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미국 경제의 견조함이 더해졌습니다. 최근 미국의 신규 실업보험 청구 건수가 1969년 이후 최저 수준을 기록하면서 달러 강세는 더욱 확고해졌는데요. 반면 일본은행은 기준금리를 31년 만에 최고인 1%로 올렸지만, 여전히 미국의 3.50~3.75%와는 큰 격차를 보이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가 최근 '호네부토 방침'에서 확장적 재정 기조를 재확인한 점도 엔화 약세를 부추기는 요인으로 꼽힙니다. 가타야마 사쓰키 일본 재무상이 구두 개입에 나섰지만, 시장은 이미 실제 개입까지 이뤄졌다는 점을 감안해 추가 대응 카드가 제한적일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원화 강세, 수급 요인과 위안화 동조화가 이끌다
원화가 이처럼 단연 강세를 보이는 데는 국내 특수한 수급 요인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SK하이닉스가 미국 ADR 상장으로 확보한 265억 달러 규모의 자금을 환전하고 있고, 조선사들의 선물환 매도와 수출기업들의 달러 매도가 이어졌습니다. 외국인 투자자들의 주식 순매수와 외환당국의 시장 안정화 의지도 하락 압력을 더했습니다. 이처럼 달러 공급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원화는 자연스럽게 강세를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원화는 최근 위안화와 동조화되는 경향이 뚜렷해졌습니다. 중국의 2분기 성장률이 시장 전망을 웃돌고 수출이 전년 동기 대비 20% 넘게 늘면서 위안화가 힘을 받고 있는데요. 중국 정부가 하반기 인프라 투자와 내수 부양을 강화할 것이라는 기대감도 원화의 흐름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원화 강세가 지속될지는 미지수입니다. 수출기업의 환전 물량이 줄어들거나 외국인이 다시 주식을 순매도하기 시작하면, 원화는 위안화보다 글로벌 달러와 엔화 움직임에 다시 민감하게 반응하며 방향을 튤 가능성이 충분히 남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