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한마디에 불붙은 가문 논란
배우 하영이 예능 프로그램에서 4대째 이어온 의사 집안을 소개한 것이 이번 논란의 시작이었습니다. 증조부 안상호가 고종 황제를 진료하고 일본에서 양의학을 배워온 근대 의료의 선구자라는 가족사는 당초 화제가 되었지만, 방송 이후 역사적 기록이 하나둘 드러나면서 상황은 급변했습니다. 안상호가 친일 단체인 대정친목회의 평의원으로 이름을 올렸고, 조선총독부 기관지에서 내선일체의 모범 사례로 소개된 사실이 확인된 것이죠.
소속사 비스터스엔터테인먼트는 처음에는 해당 의혹을 사실무근이라고 부인했습니다. 하지만 하루 만에 입장을 번복하며, 충분한 검증 없이 성급하게 답변해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공식 사과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넷플릭스는 예정된 홍보 영상을 비공개로 전환했고, 삼성전자 등 기업 광고도 잠시 내려지는 등 파장이 작품 홍보 전반으로 번졌습니다. 광복절을 앞둔 민감한 시점이라는 점도 논란을 더 키웠습니다.
의료 선구자 뒤에 가려진 행적
안상호는 1902년 일본 도쿄자혜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인 최초로 일본 의사 자격을 취득한 인물입니다. 한양에 서양식 병원을 개원하고 고종과 순종의 주치의로 활동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는데요. 이런 업적 덕분에 하영은 방송에서 자연스럽게 가문의 역사를 언급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이면에는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가 안상호 가정을 조선인과 상종하지 않는 일선동체의 표본으로 내세운 기사가 존재했고, 경기도 안양에 세워진 송덕비마저 친일문화잔재 아카이브에 등재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에 이완용을 치료한 의사 명단에 안상호가 포함되었다는 의혹까지 제기되며 논란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습니다. 비록 직접적인 학살이나 밀고 행위가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대정친목회라는 친일 단체의 평의원으로 활동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대중의 거센 질타를 피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일부에서는 조부인 안부호가 국립소록도병원에서 근무한 이력까지 거론하며 가문 전체에 대한 역사적 책임론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구조적 친일인가, 개인의 선택인가
논란이 커지자 학계에서도 엇갈린 해석이 나왔습니다. 박유하 명예교수는 당시 엘리트들이 처한 구조적 친일의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고 설명했고, 심용환 소장은 구체적인 부역 행위 없이 단체 가입만으로 친일파를 규정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경계했습니다. 의사로서 환자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직업 윤리였다는 주장도 이어졌지만, 같은 시대 의사들이 모두 그런 선택을 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김필순은 만주에서 독립군 주치의로 활동하며 군자금을 지원했고, 이태준과 박서양 역시 의료 활동과 독립운동을 병행하며 건국포장까지 받았습니다. 이들의 사례는 식민지라는 거대한 구조 속에서도 협력 외에 다른 길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당연히 모든 인물을 동일한 잣대로 재단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번 논란이 던진 화두는 명확합니다. 역사적 진실에 대한 충분한 검증 없이 과거를 아름답게 포장할 때, 그 대가는 후손에게 고스란히 돌아온다는 사실입니다. 하영과 소속사는 이제 신중한 자세로 상황을 수습해 나가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