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이 세운 중국산 하이브리드차의 벽
유럽연합이 중국산 하이브리드 차량 수입을 연간 35만 대로 제한하기로 했습니다. 4년간 시행되는 세이프가드 조치로, 첫해 상한은 35만 대이며 2년 차부터 매년 6%씩 늘어나 4년 차에는 약 42만 대까지 확대됩니다. 하이브리드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모두에 적용되는데요. 올해 중국이 EU에 수출할 것으로 추산되는 물량이 80만 대 수준인 만큼, 절반 이상이 줄어드는 셈입니다.
이번 합의는 지난 8일과 9일 베이징에서 열린 협상에서 나왔습니다. 중국 상무부 장관 왕원타오와 EU 통상 담당 집행위원 마로시 셰프초비치가 만나 하이브리드 및 전기차 무역을 집중 논의했고, 수출 물량을 적정 수준으로 조정하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양측은 세계무역기구의 비차별 원칙을 지키기 위해 모든 원산지 하이브리드 차량에 상한을 두되, 중국 쿼터를 다른 나라보다 낮게 두지는 않기로 했습니다.
배경에는 유럽 전기차 시장의 급격한 변화가 있습니다. EU는 이미 중국산 전기차에 45.3%의 관세를 매기지만, 하이브리드에는 기본 관세 10%만 붙습니다. 그 틈을 타 중국산 하이브리드 수입이 2023년 3만 2천 대에서 2024년 10만 7천 대로 급증했고, 올해는 80만 대까지 뛸 것으로 예상됐습니다.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이번 합의가 불공정 경쟁으로부터 유럽 시장을 보호할 것이라며 환영했습니다.
보호막 안팎의 셈법
문제는 이 보호막의 경계선입니다. 스텔란티스와 르노는 파리에서 열린 포럼에서 영국을 EU 27개 회원국과 같은 지위에 두고, 영국 역시 중국산 차량 수입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영국이 유럽 자동차 생태계에 참여하려면 같은 규칙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EU가 추진하는 산업가속화법 초안에 따르면, 공공기관이 사거나 보조금을 받는 차량은 유럽에서 생산되고 충분한 유럽 부품을 써야 합니다. 그런데 '유럽산'의 정의에 영국이 포함될지를 두고 의견이 갈립니다. 유럽자동차제조협회와 부품협회는 영국을 포함해야 한다는 쪽이고, 일부 프랑스 관료들은 브렉시트를 이유로 제외해야 한다고 맞섭니다. 영국은 엘즈미어 포트에서 소형 밴을 만들며 자국산 차량이 역내 생산으로 인정받도록 EU를 설득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상황도 만만치 않습니다. 미국은 중국산 전기차에 127.5%의 관세를 매기고, 일본은 자국 기업에 보조금을 쏟아붓습니다. 반면 한국은 한중 자유무역협정에 따라 8%의 관세만 부과하는데, 중국은 한국산 차량에 15%를 매기고 있습니다. 2024년 상반기 국내 전기차 신규 등록 가운데 35%가 중국산이었고, 같은 기간 한국 자동차 생산은 410만 대로 2년 연속 줄었습니다.
남은 변수들
유럽 완성차 업계는 전기차 전환과 수요 감소가 겹친 상황에서 중국 업체의 공세에 맞설 새 전략을 찾고 있습니다. 관세와 쿼터만으로는 시간을 벌 수 있어도 근본적인 경쟁력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우리 정부를 향한 목소리도 커지고 있습니다. 한중 FTA가 체결된 지 10년이 지나면서 산업 경쟁력 지형이 크게 바뀐 만큼 개정 협상이 시급하다는 주장입니다. EU의 중국산 인버터 수입 제한 검토에 LS일렉트릭과 OCI파워 같은 기업들도 상황을 주시하고 있고, 중국 리튬 선물 가격은 10% 급락했습니다. 결국 관건은 유럽의 보호 조치가 어디까지 확장되느냐, 그리고 한국이 그 사이에서 어떤 자리를 잡느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