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바이오 산업이 글로벌 제약사의 막대한 투자 유치에 성공하며 새로운 전환점을 맞고 있습니다. 일라이릴리와 로슈가 보건복지부와 각각 5년간 7470억원, 7100억원 규모의 투자 양해각서를 체결했는데요, 두 기업의 투자액을 합치면 1조 4천억 원에 육박하는 규모입니다. 이는 한국이 코로나19 팬데믹을 계기로 주목받은 ‘생산 허브’의 이미지를 넘어, 이제 본격적으로 연구개발(R&D)의 글로벌 핵심 거점으로 인정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입니다. 특히 릴리의 ‘릴리게이트랩스(LGL)’ 같은 오픈 이노베이션 프로그램이 국내에 진출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로, 단순한 자금 지원이 아닌 생태계 차원의 협력이 시작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생산에서 연구개발로, 투자의 패러다임 전환
글로벌 제약사들의 한국에 대한 접근 방식이 뚜렷이 바뀌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원부자재 공급이나 위탁생산(CMO)을 위한 생산 시설 투자가 주를 이뤘다면, 최근의 투자는 연구 개발 역량과 혁신 생태계에 직접 투자하는 형태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릴리는 이미 중국 시장에서 레고켐바이오(LGC)와의 ADC(항체-약물 접합체) 기술 협력을 통해 성과를 낸 경험이 있는데요, 한국에서도 유사한 ‘성공 방정식’을 재현하려는 의지로 읽힙니다. 릴리 관계자는 “한국은 혁신적인 바이오 기술을 보유한 기업들이 많아 협력 잠재력이 높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로슈 역시 다빈도·난치성 질환 분야의 글로벌 임상시험을 국내에 유치하고 R&D 인력 양성에 투자한다는 계획을 밝혔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한국 바이오 기업들이 가진 원천 기술과 개발 플랫폼의 수준이 세계적으로 경쟁력을 갖추었음을 반증하는 것이죠.
오픈 이노베이션, 구체적 협력의 청사진
투자의 구체적인 청사진도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릴리와 삼성바이오로직스의 협력입니다. 존 림 삼성바이오로직스 대표는 릴리 측과 손을 잡고 LGL의 신규 거점을 인천 송도 삼성바이오로직스 제2바이오캠퍼스 내 ‘C랩 아웃사이드’에 2027년까지 설립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미국과 중국에 이어 세 번째 해외 거점으로, 선정된 국내 바이오 벤처(바이오텍)에 사무공간과 실험실은 물론 연구개발 협력, 멘토링, 투자 유치까지 폭넓은 지원을 제공할 예정입니다. 삼성바이오로직스 자체도 제3바이오캠퍼스에 7조원을 투자해 AI와 자동화를 접목한 지능형 공장을 구축하며, ADC나 세포·유전자치료제(CGT) 같은 차세대 모달리티(의약품 유형) 사업을 준비 중입니다. 이런 대형 CDMO(위탁개발생산) 기업과 글로벌 제약사의 협력은 한국 바이오 생태계에 안정적인 수요와 기술 검증의 장을 동시에 열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지속 가능한 생태계 구축이 남은 과제
막대한 투자와 호재 속에서도 한국 바이오 산업이 풀어야 할 과제는 남아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번에 유치한 투자와 프로그램이 단기적인 이벤트가 아닌, 지속 가능한 생태계 구축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릴리의 LGL은 창설 이후 입주사들의 누적 투자 유치액이 30억 달러에 달하고 50개 이상의 신약 개발 프로그램을 가속화한 실적이 있습니다. 한국 거점에서도 유망한 바이오텍들이 실제로 글로벌 수준의 신약 파이프라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성공의 관건이 될 것입니다. 증권가에서는 삼성바이오로직스에 대해 5공장 가동 확대와 미국 공장 인수 효과 등으로 올해 최고 실적 경신이 예상된다며 긍정적인 평가를 내놓고 있습니다. 결국, 빅파마의 투자는 촉매제 역할을 할 뿐, 한국 바이오 산업의 장기적인 성장은 우리 기업들의 기술 혁신과 해외 시장 진출 성과에 달려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