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협력을 건 무역 압박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최우방국 영국과의 첨단 기술 협력을 일시 중단했습니다. 지난 9월 체결된 ‘기술 번영 합의(TPD)’의 이행을 보류한다는 통보인데요, 인공지능(AI), 양자컴퓨팅, 원자력 등 미래 기술 분야의 협력을 골자로 한 이 합의는 양국 관계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받아 왔습니다. 중단 배경에는 영국이 지난 5월 체결된 무역 합의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는 미국의 불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미국은 기술 협력이라는 당근을 내걸고 무역 전반, 특히 비관세 장벽 해소와 같은 민감한 분야에서 영국의 양보를 이끌어내려는 전략적 카드를 꺼낸 것으로 해석됩니다.
영국 정부는 이번 조치에 당혹스러운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키어 스타머 총리는 TPD를 두고 양국 관계의 새로운 장을 연 합의라고 평가한 바 있습니다. 합의에는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등 미국 IT 기업들의 영국에 대한 약 59조 원 규모의 대규모 투자 유치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죠. 미국의 일방적 통보는 이러한 기대에 찬물을 끼얹은 셈입니다.
협정서에 명시된 ‘연동’ 조항
미국이 합의 이행을 중단할 수 있었던 데에는 협정서 자체에 담긴 조항이 있었습니다. TPD 협정서에는 ‘이 합의는 양국 간 무역 합의의 실질적 이행과 병행되어야 효력을 갖는다’ 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미국은 이 조항을 근거로, 영국의 무역 합의 이행이 미흡하다고 판단해 기술 협력의 브레이크를 걸었습니다.
구체적인 쟁점은 비관세 장벽입니다. 미국은 영국에 미국식 식품 안전 기준, 산업재 규제, 인증 절차 등을 채택해 줄 것을 요구해 왔습니다. 쉽게 말해, 미국에서 생산된 농산물이나 공산품이 영국 시장에 더 수월하게 들어갈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추라는 압력입니다. 영국은 미국산 소고기의 무관세 수입 허용(연간 1만 3천 톤)에는 합의했지만, 다른 농산물이나 포괄적인 규제 표준 상호 인정에는 구체적인 약속을 피해 왔습니다.
양국의 엇갈린 주장과 입장
양측의 공식 입장은 뚜렷한 대비를 보입니다. 미국 측은 무역 합의 이행 지연이 310억 달러 규모의 미국 기업에 피해를 주고 있다며 강경하게 나섰습니다. 특히 영국이 미국 IT 기업들에 부과하는 ‘디지털서비스세’는 오랜 갈등 요인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과거에도 이 세금을 문제 삼으며 보복 가능성을 경고한 바 있습니다.
반면 영국 정부는 미국의 조치를 ‘전형적인 협상 압박 전술’로 치부하며 의미를 축소하려 합니다. 피터 카일 과학혁신기술 장관과 리즈 켄달 무역장관은 미국을 방문해 주요 기술 기업 대표들과 회동하며 관계 복원을 모색 중입니다. 영국 측은 디지털세가 이번 갈등의 핵심은 아니며, 협상은 건설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입장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의약품 분야 협력은 이번 조치에도 불구하고 별개로 유지될 전망이라는 것입니다. 미국은 이미 영국산 의약품에 대한 관세를 철회했고, 영국도 미국산 의약품에 대한 NHS(국민보건서비스) 예산 확대를 약속한 상태입니다. 이는 양국이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분야에서는 협력 선을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협상의 향방과 국제적 함의
현재 상황은 완전한 결별보다는 재협상을 위한 압박 국면으로 보입니다. 전문가들은 미국이 자국의 무역 및 식품 기준을 사실상의 국제 표준으로 만들려는 장기적 목표 아래, 기술 협력이라는 가치 있는 지렛대를 활용하고 있다고 분석합니다. 내년 1월로 예정된 추가 협상에서 양국이 어떤 타협점을 찾을지 주목됩니다.
이번 사태는 국제 사회에 중요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체결된 협정이라도 상대방의 추가 양보를 이끌어내기 위한 협상 카드로 언제든 재소환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기술과 무역이 긴밀하게 결합된 현대 국제 관계에서, 한 분야의 협력은 다른 분야의 협상 수단이 될 수 있음을 극명하게 드러낸 사례입니다. 양국의 기술 동맹이라는 전략적 자산이 무역 갈등의 희생양이 될지, 아니면 실질적 타협을 이끌어내는 촉매제가 될지가 관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