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모지를 넘어선 역사적 쾌거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에서 한국 스노보드 대표팀이 금, 은, 동메달을 모두 획득하며 역대 최고의 성적표를 받았습니다. ‘천재 소녀’ 최가온이 스노보드 하프파이프에서 금메달을 차지했고, 베테랑 김상겸이 평행대회전에서 은메달, 고교생 유승은이 빅에어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이번 성과는 단순히 메달 숫자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한국이 드디어 빙상, 썰매, 설상 모든 분야에서 금메달을 딴 전 세계 9개국 클럽에 합류한 순간이었죠. 일본과 중국도 이루지 못한 기록을 세우며, 한국 동계 스포츠의 지형도를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한국 동계올림픽 역사는 오랫동안 ‘빙상 의존증’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1992년 첫 메달 이후 총 79개의 메달 중 96% 이상이 빙상에서 나왔을 정도였습니다. 썰매 종목은 2018년 평창에서 윤성빈의 스켈레톤 금메달로 벽을 넘었지만, 설상 종목은 이상호의 스노보드 평행대회전 은메달이 유일한 성과에 그쳤습니다. 그런 만큼 최가온의 금메달은 오랜 숙원을 풀어준 ‘최가온이 준 선물’로 불리기도 합니다.
세대를 잇는 선수들의 도전기
이번 쾌거의 주인공들은 각기 다른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37세의 김상겸 선수는 4번째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따내며 한국 동하계 올림픽 통산 400번째 메달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과거 실업팀이 없어 일용직을 전전하기도 했던 그가 관록으로 쟁취한 값진 성과입니다. 한편 2008년생인 최가온과 유승은은 한국 스노보드의 새로운 미래를 보여줬습니다. 최가온은 하프파이프 결선 1차 시기에서 큰 부상을 입을 뻔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3차 시기에서 고득점을 받아 금메달을 역전했습니다. 유승은은 빅에어에서 한국 여자 스노보드 사상 첫 올림픽 메달을 획득했습니다.
이들의 성과 뒤에는 열악한 훈련 환경을 딛고 일어선 도전정신이 있었습니다. 국내에는 스노보드 하프파이프 전용 훈련 시설이 단 한 곳뿐입니다. 일본에 비해 훈련 인프라가 부족한 상황에서, 선수들은 해외 전지훈련에 의존하거나 제한된 조건 속에서 최고의 기량을 갈고닦아야 했습니다. 김상겸 선수의 오랜 인내와 젊은 선수들의 뛰어난 재능이 합쳐져 이룬 기적 같은 순간이었습니다.
완성된 강국, 이제 남은 과제는?
유승은 선수의 슬로프스타일 도전은 아쉽게 메달로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폭설로 하루 연기된 결선에서 12위에 그치며 ‘멀티 메달’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주 종목이 아닌 슬로프스타일에서 예선 3위로 결선에 오른 것만으로도 한국 스노보드의 가능성을 확인시켜줬습니다. 이번 올림픽은 한국이 이제 특정 종목에 의존하지 않는 ‘알파인 강국’으로 도약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미국, 독일, 캐나다 등 전통적 강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이죠.
남은 과제는 이 성과를 어떻게 지속하느냐입니다. 우수한 젊은 선수들이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지만, 체계적인 육성 시스템과 국내 훈련 인프라 확충은 아직 부족합니다. 스노보드의 인기와 성과가 스키를 포함한 다른 설상 종목으로 확산될 수 있을지도 주목할 점입니다. 금, 은, 동을 모두 거머쥔 한국 스노보드의 ‘황금 시대’가 단순한 일회성 붐이 아닌, 한국 동계 스포츠의 새로운 르네상스로 이어질지, 그 다음 페이지를 기대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