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당일 밤, 바닥난 투표용지와 무번호 용지
6월 3일 지방선거와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 당일, 전국 91개 투표소에서 투표용지가 떨어지는 사상 초유의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일부 투표소에서는 투표가 일시 중단되기도 했고, 급하게 추가 송부된 용지 2만 4천여 장 가운데 70%가 넘는 1만 7천여 장이 무번호 상태여서 현장에서 수기로 번호를 적어야 하는 혼란이 겹쳤습니다. 당시 현장에는 관련 매뉴얼조차 없어서 선거 절차가 크게 지연됐고, 유권자들의 불안감도 커졌습니다.
사태의 불씨는 인쇄율 하향 조정에서 시작됐습니다. 기존 60%였던 투표지 인쇄 하한선이 50%로 낮아졌는데, 이 결정이 위원회 심의 없이 허철훈 당시 사무총장의 전결로 이루어졌다는 점이 드러나면서 단순 실수를 넘어선 절차적 허술에 대한 국민적 불신이 커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과거 총선과 교육감 선거에서도 개표 입력 오류가 잇따라 확인되며 선관위 관리 부실에 대한 비판이 거세졌습니다.
합수본 압수수색과 대학가 시국선언
검찰과 경찰이 꾸린 합동수사본부는 중앙선관위와 서울시 선관위 등 7곳을 대상으로 약 13시간 동안 동시다발적인 압수수색을 벌였습니다. 헌법상 독립기관인 선관위가 선거 업무와 관련해 압수수색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압수수색 영장에는 노태악 전 중앙선관위원장과 허철훈 전 사무총장을 포함한 12명이 공직선거법 위반과 직무유기 혐의로 피의자로 적시되었습니다. 합수본은 선관위가 부족 사태를 사전에 인지했는지와 대응 과정에서의 고의성 여부를 집중적으로 살피고 있습니다.
특히 법원의 증거 보전 명령 아래 있던 일부 투표지 보관함이 폐기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증거 인멸 논란이 더해졌습니다. 선관위는 매뉴얼에 따른 조치였다고 해명했지만, 수사기관은 보관함 폐기 과정의 적절성을 면밀히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사회적으로도 파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전국 212개 대학에서 총 391건의 규탄 성명이 쏟아졌고, 일부 캠퍼스에서는 시국선언까지 나왔습니다. 대학가는 이번 사태를 특정 정파의 승패가 아닌 민주주의와 참정권의 문제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김민석 국무총리는 관계장관회의를 열어 선관위를 강하게 질타하며, 이런 식이라면 차라리 해체가 낫지 않겠냐는 국민의 목소리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사법 처리냐 재선거이냐...갈리는 해법과 제도 개편 과제
사태 수습 방향을 두고 국민적 의견은 팽팽하게 갈리고 있습니다. 한 여론조사 결과, 재선거 없이 사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응답이 34.1%로 가장 높았고 전국적 재선거를 주장하는 의견도 31.3%로 뒤를 이었습니다. 연령대별로는 20대와 30대에서 재선거 요구가 압도적으로 높았던 반면, 50대 이상에서는 사법 처리가 우선이라는 응답이 많았습니다. 정당 지지층별로도 민주당 지지층은 사법 책임과 문제 지역 재선거를, 국민의힘 지지층은 전국적 재선거를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국회에서는 여야가 선관위 개혁의 필요성에는 공감대를 이룬 반면, 조사 범위와 특위 구성, 특검 도입 여부를 두고는 견해 차를 보이고 있습니다. 민주당은 국정조사와 합수본 수사를 우선시하는 반면, 국민의힘은 특검 동시 추진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선관위에 대한 신뢰가 바닥을 치는 가운데, 이번 사태를 계기로 거버넌스 구조를 포함한 근본적인 제도 개편이 이루어질지 주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