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항로를 향한 한중의 도전
이재명 대통령은 중국 국빈 방문 첫날인 5일 베이징 조어대에서 열린 한중 비즈니스 포럼에서 “과거의 관성에 얽매이지 말고 새로운 항로를 개척해 나가자”고 강조했다. 고려시대 국제 무역항 벽란도를 예로 들며 상품, 사람, 문화 교류의 활기를 재현하자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양국 기업인 6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9년 만에 열린 이번 포럼은 한중 경제협력 재가동의 상징적 자리였다.
이 대통령은 “한중 교역 규모가 3000억 달러 수준에서 정체돼 있다”며 “인공지능, 소비재, 문화 콘텐츠 등 새로운 협력 분야를 개척해 교역 규모를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한중은 같은 바다를 항해하는 배와 같다. 서로 협력하고 경쟁하면서 성공적인 항해를 이어왔지만, 이제는 새로운 항로를 찾아야 할 때”라고 덧붙였다.
경제인 총출동, 실질 협력 기대
포럼에는 삼성 이재용 회장, SK 최태원 회장, 현대차 정의선 회장, LG 구광모 회장 등 4대 그룹 총수를 비롯해 포스코 장인화 회장, GS 허태수 회장, SM 장철혁 대표, 크래프톤 김창한 대표 등 200여 명의 한국 경제사절단이 참석했다. 중국 측에서는 허리펑 부총리와 TCL, CATL, 텐센트, ZTE 등 유력 기업 대표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경제계는 한중 관계 개선이 본격화되면 ‘한한령’ 완화를 비롯해 반도체, 배터리, 문화 콘텐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이 확대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정의선 회장은 “한중 관계가 개선되면 현대차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고, 최태원 회장은 ‘구동존이(求同存異)’ 정신을 언급하며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공동의 이익을 추구할 것을 주문했다.
정상회담, 안보 현안도 논의
이 대통령은 이날 오후 시진핑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갖고 한반도 비핵화, 서해 구조물 문제, 한한령 완화 등 현안을 논의했다. 특히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중국의 건설적 역할을 요청할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베네수엘라 공습 결정이 북한에 미칠 영향도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양 정상은 지난해 11월 경주 APEC에서 만난 뒤 두 달 만에 다시 만났다. 이번 회담에서 10여 건의 양해각서가 서명될 예정이며, 공식 환영식과 국빈 만찬도 진행된다. 이 대통령은 회담에서 “하나의 중국” 원칙을 재확인한 바 있다.
‘벽란도 정신’의 현대적 해석
이 대통령이 강조한 ‘벽란도 정신’은 고려와 송나라 간 활발한 교역을 상징한다. 당시 벽란도는 상품뿐 아니라 문화와 지식이 오가던 국제적 허브였다. 오늘날 한중 관계도 단순한 교역을 넘어 첨단 기술과 문화 교류로 확장해야 한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경제사절단에 K-콘텐츠 기업 대표들이 다수 포함된 것도 이런 맥락이다. SM엔터테인먼트, 크래프톤 등은 중국 시장 진출과 협력을 모색할 계획이다. 한중 FTA 서비스 투자 협상도 진전이 기대된다.
도전과 기대가 교차하는 한중 관계
한중 관계는 사드 갈등 이후 오랜 냉각기를 겪었다. 이번 방중이 관계 정상화의 결정적 계기가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다만 미중 경쟁, 대만 문제, 북핵 등 주변 정세가 복잡한 만큼 성과를 낸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양국이 경제적 상호의존도를 고려할 때 협력의 필요성은 명백하다.
이 대통령은 방중 첫날 재중 교민 간담회에서 “중국은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중요한 협력 파트너다”며 “협력 분야는 무궁무진하다”고 말했다. 이번 방문이 새로운 30년의 출발점이 되길 기대한다는 뜻이다.
한중 관계의 새로운 항로가 열릴지, 과거의 관성이 극복될지 이번 일정이 중요한 시금석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