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을 찾아 채권시장 뛰어든 대기업들
삼성전자가 막대한 현금을 바탕으로 채권시장의 새로운 큰손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2분기 말 기준 현금 및 현금성자산과 단기금융상품을 합쳐 167조 원이 넘는 유동성을 보유한 삼성전자는 국고채, 은행채, 공사채 등 초우량 채권에 수조 원대 자금을 운용하고 있는데요. 자산운용사에 일부를 일임하되 투자 가이드라인을 엄격하게 설정해 안정성을 최우선으로 두었습니다.
반면 같은 그룹 계열사인 SK하이닉스는 조금 다른 전략을 취했습니다. AA0급 이상 증권사를 중심으로 회사채와 장기 기업어음(CP), 여전채 등으로 투자 범위를 넓혔는데요. 지난 7월에는 NH투자증권이 발행한 5,000억 원 회사채 중 3,000억 원 이상을 인수하며 적극적인 행보를 보였습니다. 삼성전자가 극도의 안정성을 추구했다면, SK하이닉스는 상대적으로 수익성과 안정성의 균형을 찾아간 셈입니다.
기관 투자자 자리 채운 기업성 자금의 흐름
사실 대기업들이 채권시장에 이처럼 깊이 참여하게 된 데는 시장 환경의 변화가 크게 작용했습니다. 과거 시장을 이끌던 자산운용사, 보험사, 연기금 등 전통적 기관 투자자들이 금리 변동성 확대로 매수 여력이 크게 약해졌는데요. 7월부터 3분기까지 채권 순매수액은 68조 5,348억 원에서 28조 3,463억 원으로 41.4%나 급감했습니다. AA-급 3년물 금리 스프레드도 2020년 7월 이후 최고 수준을 기록하며 시장 불안이 가중되었습니다.
이런 공백을 메운 것이 바로 기업성 자금이었습니다. SK온의 사례가 대표적인데요. 6월과 7월에 각각 2,500억 원, 3,200억 원 규모의 CP를 발행해 총 5,700억 원을 조달하며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일반 투자자 수요가 줄어든 틈을 기업들이 채우면서 채권시장의 급격한 붕괴를 막는 지지선 역할을 한 겁니다.
시장 구조 변화와 새로운 과제
물론 기업성 자금의 참여가 시장 전체에 긍정적인 영향만 주는 것은 아닙니다. 대기업들의 투자가 특정 종목에 쏠릴 경우 가격 왜곡 우려가 있고, 기업 자금이 순환하는 구조는 언제든 유동성 상황에 따라 방향을 튈 수 있어 불안정성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현재와 같은 유동성 공급이 지속될지는 기업들의 사업 계획과 현금 흐름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데요.
당장은 기업 자금이 시장의 하방 경직성을 확보하는 중요한 축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삼성전자의 국고채 투자나 SK하이닉스의 회사채 인수는 단순한 잉여자금 운용을 넘어 채권시장의 새로운 생태계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기존 기관 투자자와 기업성 자금이 어떤 균형을 이루며 시장을 안정시킬지, 향후 자금 흐름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