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달러를 넘은 유가와 멈추지 않는 장기금리
미국과 이란 사이의 종전 양해각서(MOU)가 60일 시한을 넘겨 빈손으로 끝났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연장 의사가 전혀 없다고 못 박았고, 이란은 외교 실패 시 공세로 전환할 수 있다고 경고했는데요. 이로 인해 중동의 지정학적 긴장감이 급속도로 고조되며 글로벌 금융시장이 크게 출렁였습니다. 특히 국제 유가는 브렌트유 기준 배럴당 90달러 선을 다시 돌파하며 2%대의 가파른 상승세를 기록했습니다.
이번 유가 급등은 단순한 외교적 교착 상태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원유 수송의 핵심 동맥인 호르무즈 해협에서 상황이 심상치 않기 때문인데요. 지난 15일과 16일 사이 해협을 통과한 상선 수가 급감했고, UAE 유조선이 억류되는 사건도 발생했습니다. 사실상 해협 봉쇄 수준으로 물동량이 줄어든 것인데, 이는 중동산 원유 공급 차질이 장기화될 수 있다는 시장의 불안 심리를 극대화했습니다. 여기에 미국의 전략비축유(SPR) 재고가 1982년 이후 44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하면서 가격 안정을 위한 완충 장치마저 약해진 상황입니다.
주식과 채권이 함께 밀리는 이유
유가 상승은 곧바로 미국 국채 시장의 장기금리 급등으로 이어졌습니다. 30년물 국채금리는 5.31%에 육박하며 2007년 이후 최고치를 새로 썼고, 10년물 금리도 4.7%대에 진입했습니다. 이러한 장기금리의 가팔라짐은 주식 시장에 직접적인 부담으로 작용했습니다. 다우지수와 S&P500, 나스닥 지수가 모두 2거래일 연속 하락 마감했으며, 특히 S&P500은 전장보다 0.52% 밀렸습니다. 달러 가치 역시 중동 리스크와 금리 변동성에 흔들리며 투자자들의 불안 심리를 드러냈습니다.
물론 시장 전체가 어두웠던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반도체 업종에서는 뚜렷한 강세가 나타났는데요. 필라델피아 반도체지수는 1.6% 넘게 오르고 마이크론테크놀로지는 4% 이상 급등했습니다. 이는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이 트럼프 행정부가 애플의 중국산 메모리 반도체 구매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밝힌 영향으로, 미국 내 반도체 기업에 반사이익이 기대된다는 평가가 유입된 결과입니다. 다만 소프트웨어주는 AI 투자 대비 수익성에 대한 의구심이 커지며 메타와 마이크로소프트가 각각 3%대 하락하는 등 엇갈린 흐름을 보였습니다.
앞으로의 변수는
당분간 시장은 중동발 지정학적 리스크와 금리 변동성 사이에서 민감하게 움직일 전망입니다. 외교적 돌파구가 마련되지 않는 한 호르무즈 해협의 물리적 차질과 미국 비축유 대응 여력 축소가 맞물려 유가 변동성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 인플레이션 우려가 커지면 연방준비제도의 통화정책 완화 여지도 줄어들 수 있어 투자자들의 시계는 더욱 복잡해지고 있습니다.
이번 주 시장은 19일에 공개될 FOMC 의사록과 홈디포, 로우스, 월마트 등 주요 소매업체들의 실적 발표에 쏠리고 있습니다. 물가와 소비라는 미국 경제의 두 축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데이터들이 쏟아지는 가운데, 중동의 한 줄기 소식이 증시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예민한 시기가 이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