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업무, 쏟아지는 스트레스
2006년 지방교육행정 공무원으로 임용된 A씨는 16년 차 직장인이었다. 2022년 1월, 그는 한 학교의 행정실장으로 발령받았다. 회계, 시설관리 등 행정 업무를 총괄하는 자리였지만, A씨에게는 처음 맡는 업무였다. 부임 첫 달 초과근무만 44시간, 다음 달 22시간에 달했다. 지인과 가족에게는 “실장 업무가 너무 힘들다”, “낯선 업무에 적응이 안 된다”, “피해주기 싫어서 노력했는데 잘 안 됐다”는 고충을 자주 털어놨다.
2022년 3월, A씨는 우울증 진단을 받고 질병휴직에 들어갔다. 4개월간 입원 치료를 받은 뒤 같은 해 7월 복직해 도서관으로 발령받았다. 하지만 복직 한 달 만인 8월, A씨는 도서관 지하 계단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유족은 “업무 스트레스가 우울증을 악화시켰다”고 주장했다.
법원 “공무와 사망 인과관계 있다”
유족은 A씨의 사망이 공무상 질병에 해당한다며 순직유족급여를 청구했다. 그러나 인사혁신처는 “사망에 이를 만한 업무적 소인이 없다”는 이유로 불승인 처분을 내렸다. 인사혁신처는 A씨가 과거 정신과 진료를 받은 적이 있고, 업무 외적인 스트레스 요인도 있었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유족은 이에 불복해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서울행정법원은 최근 인사혁신처의 처분을 취소하고 원고 승소 판결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A씨가 공무상 스트레스로 인해 우울증이 악화되었고, 정상적인 인식능력·행위선택능력이 현저히 저하된 상태에서 극단적 선택을 했다”**고 판단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A씨는 행정실장 부임 전까지 특별한 정신과 치료를 받은 적이 없었고, 자살 사고도 없었다. 부임 후 과도한 초과근무와 업무 고충 토로, 우울증 진단 및 치료 기록 등을 종합해 업무 스트레스가 우울증 재발·악화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았다. 특히 상담 과정에서 A씨가 “업무가 힘들다”고 호소한 점, 진료기록 감정 결과 직무 스트레스가 우울증과 자살 사고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 인정됐다.
재판부는 “업무 외적인 스트레스도 있었겠지만, 업무상 부담이 다른 요인과 중복 작용해 우울증을 재발·악화시켰다면 공무와 사망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된다”고 밝혔다. 인사혁신처는 항소하지 않아 판결이 확정됐다.
직장 내 정신 건강, 이제는 관리해야
이번 판결은 공무원의 정신질환이 공무상 질병으로 인정될 수 있음을 보여준 중요한 사례다. 특히 과도한 업무 부담이 직원의 정신 건강을 해칠 수 있고, 그 결과에 대해 조직이 책임을 져야 함을 시사한다.
전문가들은 “직장 내 스트레스 관리를 위한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전보나 업무 배치 시 직원의 적성과 경험을 고려하고, 과도한 초과근무를 방지하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또 정신 건강 문제가 발생했을 때 적절한 상담과 치료 지원이 뒷받침돼야 한다.
A씨의 사건은 개인의 취약성만으로 치부할 수 없는 조직의 책임을 일깨워준다. 앞으로 유사한 사례에서도 법원이 공무원의 정신 건강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판결할 수 있는 선례가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