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개발에 인공지능(AI)을 접목하는 움직임이 전 세계적으로 거세지고 있습니다. 단백질 구조를 정밀하게 예측하고, 수많은 후보 물질을 빠르게 선별하는 AI 기술은 10년 이상 걸리던 개발 기간과 천문학적인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해법으로 주목받고 있는데요. 이제 신약 개발 경쟁의 핵심은 화학 실험실이 아닌, 데이터 센터와 AI 알고리즘을 장악하는 쪽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습니다. 부산에서 열린 경제포럼에서 글로벌 제약사의 대규모 투자 발표까지, AI 바이오테크 열풍의 현주소를 살펴봤습니다.
산업 패러다임을 뒤집는 AI 인프라 전쟁
가장 극적인 변화는 글로벌 거대 제약사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스위스의 로슈는 최근 엔비디아와 손잡고 ‘하이브리드 클라우드 AI 팩토리’를 출범시켰습니다. 여기엔 엔비디아의 최신 GPU가 3500개 이상 투입되는데, 이는 현재 공개된 제약업계 AI 인프라 중 최대 규모라고 합니다. 이 플랫폼은 신약 후보 물질 발굴부터 제조 공정 최적화, 진단 솔루션 개발까지 전 과정을 아우르는 슈퍼컴퓨터 역할을 하게 됩니다.
로슈의 경쟁사인 미국의 일라이 릴리도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릴리 역시 엔비디아와 협력해 AI 공동 연구소를 설립하고 자체 슈퍼컴퓨터 ‘릴리팟’을 공개하는 등 막대한 투자를 진행 중입니다. 이들의 경쟁은 단순한 기술 도입을 넘어, AI 슈퍼컴퓨팅 인프라 자체를 새로운 ‘생산 설비’로 삼기 위한 패권 다툼으로 보입니다. 신약 한 개를 찾기 위해 수백 개의 GPU가 필요한 시대가 왔고, 이러한 고성능 컴퓨팅 자원을 얼마나 빨리, 많이 확보하느냐가 기업의 생존을 좌우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효율성 경쟁에 뛰어든 국내외 기업들
이러한 글로벌 흐름 속에서 국내 기업들도 독자적인 전략으로 맞서고 있습니다. AI 신약개발 기업 신테카바이오는 데이터센터급 AI 인프라와 글로벌 임상연구기관(CRO) 네트워크를 결합한 플랫폼을 운영 중입니다. AI로 후보 물질을 설계하고 선별한 뒤, 전 세계의 실험실 인프라를 활용해 검증하는 ‘AI 설계-실험 검증’ 모델을 구축한 거죠. 이 모델은 실험 횟수와 시간을 대폭 줄여 개발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핵심은 ‘효율성 경쟁’에 있습니다. 기존 방식은 수많은 물질을 직접 합성하고 실험하는 ‘찍어 맞추기’ 방식에 가까웠다면, AI는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해 성공 가능성이 높은 물질을 먼저 예측하고 집중 공략합니다. 중국의 히트젠이나 우시앱텍 같은 기업들이 대규모 실험 플랫폼으로 빠르게 성장한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제 국내 바이오 산업도 임상 개발 역량뿐 아니라, 이 초기 ‘디스커버리’ 단계의 경쟁력을 어떻게 확보할지 고민해야 하는 시점입니다.
기술 장벽 낮아지며 열리는 지역의 기회
흥미로운 점은 AI 기술 발전이 지역 경제의 새로운 가능성도 열어주고 있다는 겁니다. 부산상공회의소가 최근 개최한 경제포럼에서 양재생 회장은 “AI 기술 발전으로 신약 개발의 기술 장벽이 낮아지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과거에는 막대한 자본과 인프라가 필요해 수도권 대기업 중심의 산업 구조였지만, 이제는 클라우드 기반의 AI 플랫폼과 도구들이 보편화되면서 상황이 바뀌고 있다는 분석입니다.
서울대 석차옥 교수도 같은 포럼에서 “AI가 질병 원인을 분자 수준에서 정확히 이해하게 해 치료 단백질 설계를 가능하게 한다”며 기술의 파급력을 설명했습니다. 부산과 같은 지역이 활발한 스타트업 생태계를 바탕으로 AI 기반 바이오테크 분야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립니다. 실제로 로슈와 릴리는 한국 시장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고 있어, 국내 생태계 전반에 긍정적인 파장이 예상됩니다. AI는 단순한 도구를 넘어, 바이오테크 산업의 지리적 중심지까지 재편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