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고가 끝난 뒤 찾아온 죽음
지난 24일 낮 대전 중구의 한 다가구주택에서 40대 여성 B씨가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전 연인인 40대 남성 A씨가 폭행한 뒤 목을 졸라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데요. B씨는 숨지기 직전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폭행을 당했다고 알렸고, 급히 달려온 아들이 의식을 잃은 어머니를 발견해 119에 신고했습니다. 피해자는 마지막 순간 가족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끝내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A씨는 범행 직후 휴대전화 유심칩을 빼고 택시를 타고 인천국제공항과 월미도, 강원도 강릉을 거쳐 달아났습니다. 경찰은 추적 끝에 다음 날 오전 강릉의 한 숙박업소에서 그를 붙잡았습니다.
우발인가, 계획인가
쟁점은 범행의 계획성입니다. A씨는 경찰 조사에서 "말다툼 중 격분해 우발적으로 범행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경찰은 유심을 분리하고 택시를 갈아타며 이동 경로를 바꾼 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도주 과정에서 드러난 치밀함이 우발적 범행이라는 진술과 맞지 않는다는 겁니다.
27일 대전지방법원은 도주 우려를 이유로 A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했습니다. 경찰은 부검과 휴대전화 디지털 포렌식으로 정확한 사인과 범행 동기를 확인하는 한편, 신상정보 공개 요건 충족 여부도 검토하고 있습니다. 대전경찰청은 유족 지원을 위해 범죄피해자지원센터, 스마일센터 등과 협의체도 꾸렸습니다.
반복된 경고, 멈춰 있던 제도
문제는 이 사건이 예고된 비극에 가까웠다는 점입니다. B씨는 지난해 10월 A씨의 지속적인 연락을 스토킹으로 신고했고, 경찰은 긴급응급조치와 신변보호용 스마트워치 지급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20여 일 뒤 B씨가 화해 의사를 밝히며 처벌을 원치 않자 사건은 불송치로 종결됐고, A씨는 위험 관리 대상에서 빠졌습니다. 그해 12월의 추가 신고도 "112가 잘못 눌렸다"는 사유로 별다른 조치 없이 마무리됐습니다.
27일 대전경찰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연 여성·인권·시민단체들은 "피해자는 위험을 알렸지만 국가 보호체계가 실패했다"고 비판했습니다. 이들은 교제폭력을 포함한 친밀관계 폭력 포괄입법과 가정폭력 반의사불벌 규정 폐지, 고위험 가해자에 대한 접근금지·분리·감독 강화를 요구했습니다.
가정·교제·스토킹 관련 112 신고는 2022년 32만5천여 건에서 2025년 43만9천여 건으로 34.8% 늘었고, 2023년부터 올해 9월까지 살인 사건 2760건 중 19.7%에서 관계성 선행 범죄가 확인됐습니다. 신고가 반복될수록 위험이 크다는 통계는 쌓이는데, 제도는 그 신호를 붙잡지 못한 셈입니다. 처벌 의사 번복 이후에도 위험 평가를 이어갈 장치를 마련할지가 남은 과제로 떠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