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란다 밖으로 떨어진 모자
지난 8월 11일 오후 4시 55분경, 서울 강서구 가양동의 한 영구임대아파트 15층에서 불이 났습니다. 약 한 시간 만에 진화되었지만, 해당 세대에 거주하던 60대 어머니와 30대 아들은 발코니 아래 화단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스프링클러 하나 없는 노후 아파트에서 취약계층 가족이 참변을 당한 겁니다.
소방 당국은 집 안쪽 창고로 쓰던 작은 방에서 화재가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당시 이웃 주민이 복도 연기를 확인해 신고했지만, 정작 집 안에 있던 모자는 현관으로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뇌병변 장애로 평소 누워 지내야 했고, 아들은 그런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직장까지 그만두고 함께 살아왔습니다. 당국은 거동이 불편한 어머니를 구하려다 발코니에서 함께 추락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사실 이 아파트는 1992년에 준공된 30년 넘은 노후 단지입니다. 당시 법규상 15층은 스프링클러 설치 의무 대상이 아니었고, 지금까지도 그대로입니다. 불이 나면 초기 진압은커녕 연기 확산조차 막을 수 없는 구조가 여전히 방치된 셈입니다.
화재 사각지대에 놓인 노후 임대주택
이번 참변을 계기로 공공임대주택의 낮은 소방 설비 실태가 드러났습니다. LH와 SH가 관리하는 임대주택 121만여 가구 중 무려 44%인 53만 가구가 스프링클러 없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특히 영구임대와 50년 공공임대 단지는 80%가 넘는 곳이 스프링클러를 설치하지 않아, 화재 사각지대가 심각한 수준입니다.
강서구의 경우 아파트 단지 321곳 중 226곳, 즉 70.4%가 스프링클러가 없어 서울 자치구 중 미설치율이 가장 높습니다. 이런 현상은 강화된 소방 기준이 기존 건축물에 소급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졌습니다. 1990년 16층 이상부터 시작된 스프링클러 의무 설치는 2018년에야 6층 이상으로 확대되었는데, 이미 지어진 건물들은 예외로 쳐진 겁니다.
반대로 노후 아파트에 스프링클러를 새로 달기는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배관과 물탱크를 추가로 설치하려면 막대한 비용이 들고, 층고나 구조상 법적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더군다나 입주민이 관리주체 동의 없이 임의로 소방시설을 변경할 수 없는 제약도 있습니다.
취약계층 대피는 누가 지키나
이번에 숨진 어머니는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이었고, 아들은 그를 돌보는 보호자였습니다. 임대주택에는 이처럼 대피가 어려운 고령자와 장애인이 많이 거주하고 있어 피해 위험이 더 큽니다. 실제로 장애인의 화재 사망률은 일반 인구보다 약 4배나 높게 나타났습니다. 이런 구조적 취약성은 단순히 개인의 대피 능력 문제가 아니라, 사회 안전망의 공백을 보여주는 지표입니다.
전문가들은 노후 아파트의 스프링클러 추가 설치가 어렵다면, 설치가 간편한 단독경보형 감지기나 가정용 소화기 보급을 최선의 대안으로 꼽습니다. 자동확산소화기와 열·연기 복합감지기 보강도 현실적인 방안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와 지자체가 비용을 지원하는 정책적 뒷받침이 필요합니다.
경찰과 소방 당국은 합동 감식을 통해 정확한 화재 원인과 추락 경위를 조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참변이 남긴 질문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30년 넘은 아파트에서 취약계층의 안전은 누가, 어떻게 지켜야 하는 것인지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