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면 하나로 번진 사법부 갈등
조희대 대법원장이 대법관 후보자를 서면으로 제청하면서 사법부를 중심으로 한 정치권의 갈등이 크게 번지고 있습니다. 지난 19일 조 대법원장은 손봉기 대구지법 부장판사와 김성수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대통령에게 서면으로 임명 제청했는데요. 기존에는 청와대와 사전 협의를 거쳐 대면 제청하는 것이 관행이었지만, 이번에는 그 절차를 생략했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를 대통령 임명권을 무시한 '꼼수'이자 '또 다른 사법농단'으로 규정하며 강하게 반발했고, 김민석 대표는 조 대법원장을 '해방 이후 최악의 대법원장'이라 칭하며 사퇴까지 요구했습니다. 반면 국민의힘은 오히려 민주당이 사법권 독립을 후퇴시키고 정쟁을 유발하고 있다고 맞받아치며 팽팽한 대립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번 서면 제청은 단순한 절차 논란을 넘어 사법부와 행정부 간의 신뢰 관계가 얼마나 흔들렸는지를 보여주는 사안입니다.
대법관 공백과 법원행정처 폐지론
이 갈등의 이면에는 대법관 공백이라는 현실적인 우려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노태악 전 대법관의 후임 자리는 이미 5개월 넘게 비어 있고, 오는 9월 7일에는 이흥구 대법관까지 퇴임하면서 두 자리가 동시에 공석이 될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특히 이흥구 대법관이 속한 3부는 정원의 절반으로 줄어들어 남은 대법관들의 사건 부담이 크게 늘어날 전망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당은 법원행정처 폐지와 외부 인사가 참여하는 사법행정위원회 신설을 골자로 하는 법원조직법 개정안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권칠승 정책위의장은 이를 21대 국회 때부터 논의되어 온 구조적 개선이라고 설명했지만, 사법부 안팎에서는 외부 인사의 참여가 헌법 제101조에 위배될 수 있다는 위헌 우려와 행정 효율성 저하에 대한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무작정 폐지할 경우 재판 지연 등 국민의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함께 제기되고 있습니다.
법원행정처 폐지론은 대법원장의 제왕적 권한을 견제하자는 취지이지만, 대안 없는 성급한 추진은 오히려 사법 서비스 공백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탄핵 대신 사퇴 압박, 사법 지형을 둘러싼 셈법
민주당이 탄핵을 요구하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조 대법원장의 자진 사퇴에 더 집중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헌법재판소에서 중대한 위반으로 인정되지 않을 경우 역풍을 맞을 수 있고, 탄핵 절차 중 사법부 공백이 '입법 독주'라는 프레임으로 비화될 수 있다는 정치적 부담이 크기 때문입니다.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는 이재명 대통령이 조 대법원장을 압박하는 배경에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의 대법원 파기환송 결정이 자리 잡고 있다고 분석하며, 이 대통령의 행보가 과거 윤석열 전 대통령과 닮아가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결국 이번 사태는 대법원 인적 구성을 둘러싼 권력 투쟁의 성격이 강하며, 제도 개편 논의와 인선 갈등이 뒤엉켜 쉽게 풀리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사법 개혁의 명분과 사법권 독립의 가치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것이 이제 정치권과 사법부가 함께 풀어야 할 과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