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환율 지속, 두 가지 힘의 충돌
달러-원 환율이 1520원대에서 좀처럼 내려오지 않고 있습니다. 6월 11일 서울외환시장에서는 1,525원선에서 거래를 시작하는 등 높은 수준을 유지했는데요. 시장을 움직이는 두 가지 큰 힘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습니다. 하나는 미국의 물가 지표가 예상에 부합했다는 안도감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과 이란 간 군사적 충돌이 격화되면서 커진 지정학적 리스크입니다.
미국 노동부가 발표한 5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전년 대비 4.2% 상승하며 시장 예상치에 들어맞았습니다. 특히 근원 CPI는 전월 대비 0.2% 오르며 예상치(0.3%)를 밑돌았는데요. 이 소식에 달러 인덱스는 100선 안팎에서 보합세를 보였고, 달러-원 환율도 상승분을 일부 반납하며 1,520.20원(야간 마감 기준)까지 내려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중동 상황이었습니다.
불안 키우는 중동, 안전자산 선호 확산
미국이 이란 내 방공 시설을 추가 공습하면서 양측의 충돌이 격화되고 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란 관리들과 대화했다는 사실을 공개하며 강경 대응을 예고했고, 이란 측도 맞대응에 나서는 모양새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국제유가는 배럴당 90달러선을 회복하며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지정학적 불안은 투자 심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유가증권시장에서 23거래일 연속 순매도를 이어가며 이날에만 2조 7천억 원 이상을 팔아치웠습니다. 코스피 지수는 7,900선까지 밀리며 8,000선이 다시 무너졌습니다. 시장 참가자들은 달러와 같은 안전자산으로 몰리면서 환율 상승 압력을 키우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CPI 발표가 단기적으로 안도감을 줬지만, 중동 리스크와 고유가가 지속되는 한 환율의 방향성은 여전히 위쪽으로 열려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특히 서부텍사스산 원유(WTI) 가격이 90달러를 넘나들면서 에너지 가격의 추가 상승이 물가와 환율에 다시 부담을 줄 가능성이 있습니다.
정부 대책과 시장의 피로감
정부와 한국은행은 고환율을 잡기 위해 여러 카드를 꺼내 들었습니다. 외환 당국은 구두 개입에 이어 주요 외국환은행에 대한 공동검사에 착수했고, 국민연금은 해외 투자 자산에 대한 환헤지 비율을 높여 달러 매도 물량을 공급하고 있습니다. 또한 해외주식 투자자의 자금을 국내로 돌리기 위해 세제 혜택을 주는 '환율안정 3법'도 시행 중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들이 추세를 바꾸기엔 역부족이라는 평가가 많습니다.
실제로 외환시장의 거래량은 급감했습니다. 11일 현물환 거래량은 96억 달러 수준으로 평소의 절반에 그쳤는데요. 시장 참가자들이 높은 변동성에 피로감을 느끼며 관망세로 돌아선 겁니다. 은행들도 당국의 경고에 달러 예금 금리 인상을 자제하는 등 눈치를 보고 있습니다.
향후 환율의 향방은 6월 중 예정된 주요국 통화정책회의가 분수령이 될 전망입니다. 유럽중앙은행(ECB) 회의를 시작으로 일본은행(BOJ),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금리 결정이 연이어 발표됩니다. 특히 일본의 긴축 선회 가능성은 엔화 강세를 통해 원화에도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당분간 환율은 중동 변수와 글로벌 통화정책 사이에서 출렁이는 흐름이 이어질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