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국민배우의 마지막 인사
9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이순재 배우의 빈소에는 금관문화훈장이 놓여 있습니다. 정부는 25일 그의 70년에 걸친 연기 인생과 문화예술 발전 기여를 인정해 최고 등급 훈장을 추서했습니다. 지난해 KBS 연기대상 수상 소감에서 "신세 많이 졌습니다"라고 말했던 그가 남긴 마지막 인사는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렸습니다. 2021년 윤여정, 2022년 이정재에 이어 배우로서 3년 만에 수여된 금관문화훈장은 그의 남다른 족적을 증명하고 있죠.
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빈소를 찾아 "연극, 영화, 방송을 아우르며 칠십 년의 세월 동안 늘 우리 국민과 함께하며 울고 웃으셨다"고 추모했습니다. 1956년 연극 '지평선 넘어'로 데뷔한 이래 140편이 넘는 작품에 출연하며 그는 진정한 '국민배우'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연예인에서 정치인, 다시 연예인으로
이순재 배우의 인생은 다양한 궤적을 그렸습니다. 1992년 14대 국회의원으로 정치계에 진출했지만, 1995년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연예계로 돌아왔습니다. 당시 그는 "내 마음의 고향은 방송"이라며 연예인으로 기억되기를 희망했는데요.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에서 쌓은 '국민 아버지' 이미지와 김영삼 대통령과의 서울대 동문 관계가 정치 입문의 발판이 됐지만, 결국 그는 자신의 진정한 소명이 연기에 있음을 깨달은 겁니다.
의정 활동 당시 문화체육공보위원회 위원으로서 현장 경험을 살린 의견을 개진하기도 했지만, 그의 정치 인생보다는 70년 연기 인생이 더욱 빛을 발했습니다. 정치인 이순재보다 배우 이순재로 기억되길 원했던 그의 선택은 지금 되돌아보면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모두가 하늘로 떠난 '그대를 사랑합니다'
이순재의 별세로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됐습니다. 2011년 개봉한 이 영화의 주연 네 사람 모두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인데요. 윤소정(2017년), 송재호(2020년), 김수미(2024년)에 이어 이순재까지 모두 하늘나라로 떠나면서 이 작품은 더 이상 새로운 모습으로 그들을 만날 수 없는 유일한 작품이 되었습니다.
온라인에서는 "이제 모두들 그곳에서 만나셨을 거 같다"는 추모 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영화에서 이순재는 욕쟁이 노인 김만석 역을 맡아 폐지를 주우는 송이뿐(윤소정)에게 서툴지만 애틋한 사랑을 표현했죠. 네 배우의 완숙한 연기는 한국 영화사에서 노년 멜로 장르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후배들이 전하는 눈물의 추모
이순재의 빈소에는 수많은 후배 배우들이 찾아와 깊은 애도를 표했습니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할아버지와 손자 역할로 호흡을 맞췄던 정일우는 "배우로서 첫걸음을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한 영광"이라고 말했습니다. 유연석은 대학교 시절 스승이었던 이순재가 "진정 좋아하는 일을 한다면 적어도 10년간은 묵묵히 해낼 줄 알아야 한다"는 조언으로 자신의 무명 시절을 버틸 수 있었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꽃보다 할배'를 함께한 동료들의 애도도 이어졌습니다. 백일섭은 "95세까지 연기하자"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에 안타까움을 표했고, 박근형은 그를 '평생 리더'라고 칭하며 늘 동료들을 이끌었던 모습을 회상했습니다. 이처럼 수많은 후배와 동료들의 추모는 그가 단순한 배우를 넘어 '큰어른'으로서 자리매김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지막까지 연기에 대한 열정
지난해 KBS 연기대상에서 그는 최고령 수상자라는 기록을 세우며 "연기를 연기로 평가해야 한다"는 소신을 밝혔습니다. 인기나 다른 조건이 아닌 순수한 연기력으로 평가받고 싶다는 그의 말은 연기계에 깊은 울림을 주었죠. 생전 그는 무대 위에서 숨을 거두고 싶다는 소망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MBC는 김호성 PD가 연출하는 이순재 다큐멘터리를 긴급 편성하고, KBS는 그의 마지막 드라마 출연작 '개소리' 전 회차를 재방송하며 추모하고 있습니다. 7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한결같이 연기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던 그의 모습은 후배 배우들에게 영원한 귀감이 될 것입니다. 27일 오전 6시 20분, 서울아산병원에서 마지막 길을 떠나는 이순재 배우의 유언처럼 우리 모두 그에게 '신세 많이 졌습니다'라는 인사를 전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