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돌과 항의, 그리고 되풀이되는 악몽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첫날, 혼성 2000m 계주 준결승에서 악몽 같은 장면이 펼쳐졌습니다. 미국 선수 커린 스토더드가 넘어지면서 뒤따르던 한국의 김길리가 피하지 못하고 충돌했고, 한국 대표팀은 결승 진출에 실패했습니다. 이 장면은 많은 이들에게 4년 전 베이징 올림픽 혼성계주 탈락의 기억을 생생하게 떠올리게 했습니다. 당시에도 한국은 예상치 못한 실수로 메달을 놓쳤죠. 김길리는 충돌 직후 오른팔이 부러질까 봐 걱정했다고 했지만, 다행히 검진 결과 큰 부상은 아니어서 팬들을 안심시켰습니다. 하지만 이번 실패는 단순한 사고를 넘어 대회 운영 전반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했습니다.
사고 직후, 김민정 코치는 100달러를 들고 심판진에게 다가갔습니다. 국제빙상연맹(ISU) 규정에 따라 공식 항의를 할 때 필요한 예치금이었죠. 코치는 한국 팀이 2위 자리를 달리고 있던 중 충돌이 발생했다며 구제 조치를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심판진은 기존 판정을 번복하지 않았고, 항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이 과정은 쇼트트랙 경기의 예측불가능성과 함께, 공식적인 항의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었습니다.
변수가 된 ‘말랑말랑’ 빙판의 진실
혼성계주에서의 충돌은 단순히 한 선수의 실수로만 끝나지 않았습니다. 경기 후 미국과 한국 선수들은 공통적으로 한 가지를 지적했는데요, 바로 경기장의 얼음 상태가 ‘너무 무르다’는 점이었습니다. 미국 대표팀 앤드류 허는 관중이 많아지고 날씨가 더워지면서 빙판이 평소 훈련할 때보다 무르게 변했다고 분석했습니다. 한국의 임종언 코치도 훈련 때보다 빙질이 무르고 미끄러워 선수들이 실수를 하고 있다고 말하며, 경기 중 전략 조정이 필요하다고 덧붙였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쇼트트랙과 피겨스케이팅이 같은 경기장에서 번갈아 열리며 발생하는 ‘얼음 관리’의 난제에 있습니다. 피겨는 얇고 무른 얼음이, 쇼트트랙은 두껍고 단단한 얼음이 최적의 조건인데, 두 종목이 같은 날 진행되면 최적의 상태를 유지하기가 매우 까다롭습니다. 2018 평창 올림픽에서는 시간대별로 세심하게 빙질을 관리하며 이런 문제를 최소화했던 사례가 있죠. 그러나 이번 대회에서는 이러한 어려움이 선수들의 불만으로 직접 이어졌습니다. 조직위원회는 아이스 마스터가 경기 중에도 온도를 지속 측정하며 큰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지만, 선수들의 체감은 사뭇 다릅니다.
베이징의 기억을 되새기며 펼치는 반전 도전
혼성계주의 아픈 기억은 있지만, 한국 쇼트트랙 대표팀에게는 희망적인 전례가 있습니다. 바로 2022 베이징 올림픽이죠. 당시에도 혼성계주에서의 탈락이라는 충격적인 스타트를 끊었지만, 이후 개인전에서 최민정과 황대헌이 각각 금메달을 따내며 ‘반전 드라마’를 완성했습니다. 이번에도 선수들은 그때의 경험을 발판 삼아 남은 개인전에 모든 것을 걸고 있습니다. 최민정은 500m 예선을 무난히 통과했으며, 황대헌도 1000m에서 좋은 출발을 보였습니다.
주목받는 선수는 역시 김길리입니다. 1500m의 강자로 꼽히는 그녀는 1000m와 500m에서도 메달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충돌 사고의 충격을 털어내고 몸 상태를 완벽히 회복했다는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죠. 하지만 도전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세계 랭킹 1위인 캐나다의 윌리엄 단지누와 코트니 사로, 그리고 홈 이점을 누리는 이탈리아 선수들이 강력한 경쟁자로 버티고 있습니다. 특히 이탈리아는 이미 혼성계주에서 금메달을 따내며 무르다는 빙질에도 오히려 잘 적응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한국 대표팀은 예상치 못한 변수와 강력한 라이벌들을 상대로 베이징에서 보여준 그 ‘반전’을 다시 한번 연출할 수 있을지, 모든 시선이 남은 개인전 경기에 쏠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