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화 가치가 금융위기 이후 최저 수준으로
원화 가치가 세계 주요 64개국 중 꼴찌에서 다섯 번째로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원화의 명목 실효 환율(NEER)은 86.56을 기록했는데요, 아르헨티나, 튀르키예, 일본, 인도 다음으로 낮은 수치입니다. 이는 2011년 이후 최저 수준이에요. 더 심각한 건 물가 수준을 반영한 실질 실효 환율인데, 87.05로 2009년 금융위기 직후 이후 가장 낮은 값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원화의 구매력이 크게 약화되었다는 의미죠.
실제 외환시장에서도 원·달러 환율은 10거래일 연속 상승하며 1477.5원에 마감했습니다. 1480원 선을 위협하는 수준인데요, 이는 2008년 금융위기 당시 12거래일 연속 상승에 버금가는, 약 15년 만에 가장 오랜 기간의 상승세입니다. 새해 들어서만 약 47.7원이나 올랐어요. 외환당국이 지난해 12월 20억~30억 달러 규모로 시장에 개입해 잠시 끌어내렸지만, 그 효과가 한 달 만에 거의 사라진 모습입니다.
고환율에 제조업 현장이 얼어붙고 있다
환율 급등의 영향은 이미 실물 경제 현장에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경기도의 자동차 부품, 금속 가공, 전자 부품 업종을 중심으로 수입 원자재 의존도가 높은 기업들이 원가 상승 압박에 시달리고 있죠. 군포시의 한 자동차 부품 업체는 "납품 단가를 올리려 해도 쉽지 않다"고 호소합니다. 과거에는 고환율이 수출 기업에 유리하다는 인식이 있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릅니다. 수출품을 만들기 위한 원재료와 중간재 수입 비용이 급격히 늘어나 오히려 영업이익률을 깎아먹는 구조가 됐어요. 환율 상승으로 이익을 보는 기업은 소수에 불과하다는 게 업계의 중론입니다.
한국개발연구원(KDI)도 소비는 개선되고 있지만, 제조업과 건설업의 침체가 전체 경기 회복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특히 수입 중간재 가격 지수가 지난해 하반기 급등하면서 공장 가동 자체가 손실로 이어지는 상황까지 발생하고 있어요. 건설 자재 운송비 증가까지 겹치며 중소 제조업체들의 경영난은 더욱 가중되고 있습니다.
당국의 개입과 구조적 한계 사이에서
정부와 한국은행은 환율 안정을 위해 다양한 카드를 꺼내 들고 있습니다. 외환시장에 직접 개입하는가 하면, 구두 개입을 통해 시장에 신호를 보내기도 하죠. 최근에는 국민연금의 환헤지(위험 회피) 확대나 외화예금 과열을 막기 위해 은행들의 달러 예금 금리 인하를 유도하기도 했습니다. 안철수 의원은 심지어 청와대에 '환율최고책임자'를 신설해 강력한 컨트롤타워를 구축하자고 제안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이러한 조치들에도 불구하고 환율 상승세가 꺾이지 않는 데는 복잡한 구조적 요인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미국 연준의 고금리 기조 지속과 이에 따른 달러 강세, 한국과 미국의 금리 차, 그리고 국내 투자자들의 적극적인 해외 자산 투자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달 들어 국내 개인 투자자의 미국 주식 순매수액은 약 23억 달러로 동기 기준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죠. 엔화 약세까지 더해지며 원화는 이중고를 겪고 있습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로 지목되는 것은 통화량입니다. 한국의 명목 GDP 대비 광의 통화(M2) 비율이 미국보다 2배 이상 높은 수준으로, 실질 경제 규모에 비해 시중에 유동성이 과도하게 풀려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동국대 강경훈 교수는 "과잉 유동성이 환율 상승을 자극하고 있다"고 분석했어요. 결국 단기적인 시장 개입만으로는 이러한 구조적 요인들을 되돌리기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진단입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도 과도한 비관론을 경계하면서도, 해외 투자은행들이 원화 가치가 1400원 초반으로 회복될 것이라고 전망하는 점을 언급했습니다. 하지만 당장 눈앞의 고환율이 경제에 미치는 충격을 무시할 수 없는 만큼, 경제 근본 체질을 개선하는 중장기 전략과 함께 당국의 신속한 위기 관리가 동시에 요구되는 상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