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 하지만 준비는 부족한
내년 1월 22일, 한국은 ‘인공지능 발전과 신뢰 기반 조성 등에 관한 기본법’(AI 기본법)을 시행하며 공식적으로 세계 최초로 AI에 대한 포괄적 법규를 갖는 국가가 됩니다. 유럽연합(EU)의 AI법이 내년 8월부터 고위험 분위에 한해 적용되는 것과 비교하면, 적용 시점과 범위 모두에서 앞서나가는 셈이죠. 하지만 이 ‘세계 최초’라는 타이틀 뒤에는 국내 AI 산업계, 특히 중소기업과 스타트업의 적잖은 우려와 부담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스타트업얼라이언스의 조사에 따르면 국내 AI 스타트업의 무려 98%가 법 시행에 대비한 실질적인 대응 체계를 갖추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절반 이상은 법의 세부 내용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황인데요. 시행령이 시행 직전에나 확정될 가능성이 높아, 실제 준비할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게 업계의 공통된 목소리입니다. 한마디로 법은 이미 출발선에 섰지만, 주된 당사자들은 아직 출발 준비도 제대로 못 한 격이죠.
EU는 완화, 한국은 강화? 규제의 온도 차
흥미로운 점은 글로벌 흐름과 국내의 조치가 어느 정도 반대로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EU는 원래 엄격한 규제 방안을 추진했지만, 최근 규제를 완화하는 내용의 합의안을 발표하며 적용 시점도 16개월 뒤로 늦췄습니다. 과도한 규제가 AI 분야 경쟁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회원국들의 우려와 미국 빅테크의 압력이 반영된 결과로 풀이됩니다. 일본 역시 강제적 규제보다는 산업계의 자율 규제를 강조하는 방향을 택하고 있습니다.
반면 한국은 이 흐름과 별개로 자신만의 속도로 법 시행을 강행하고 있습니다. 물론 AI 기술의 빠른 발전에 따른 사회적 문제를 미리 예방하고, 투명하고 신뢰할 수 있는 AI 생태계를 조성하려는 취지는 분명히 이해됩니다. 하지만 글로벌 트렌드와의 이러한 ‘역주행’이 오히려 국내 산업의 경쟁력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해외 기업들은 비교적 유연한 규제 환경에서 기술 개발에 집중하는 동안, 국내 기업들은 복잡한 규제 준비에 부담을 느낄 수 있다는 걱정이죠.
쟁점은 ‘표시 의무’와 ‘고영향 AI’ 정의
업계의 구체적인 고민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AI 생성물에 대한 표시 의무화입니다. 법안은 AI가 생성한 콘텐츠에는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 표시(워터마크)를 부착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투명성 확보를 위한 당연한 조치처럼 보이지만, 현장에선 복잡한 문제를 낳습니다. 예를 들어, 작가가 AI를 보조 도구로 약간만 활용한 창작물도 ‘AI 생성물’ 딱지를 붙여야 할까요? 업계 관계자들은 “단순히 AI를 사용했다는 이유만으로 소비자에게 부정적으로 인식될 수 있다”며 창의성과 실용성 사이에서의 갈등을 토로합니다.
둘째는 ‘고영향 AI’의 범주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입니다. 법은 사용자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고영향 AI 사업자에게 더 엄격한 안전성 확보 의무를 부과합니다. 문제는 어떤 AI 서비스가 ‘고영향’에 해당하는지에 대한 기준이 아직 모호하다는 점이에요. 이 기준이 너무 포괄적으로 설정되면, 혁신적이지만 자본과 인력이 부족한 스타트업들은 과도한 규제 부담으로 사업을 접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불확실성 속에서의 선택과 전망
이러한 불확실성은 이미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일부 국내 AI 스타트업은 규제 환경이 더 유연한 일본 시장으로의 사업 확대를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해외 진출이 아니라, 국내의 조기 시행과 모호한 규제가 혁신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업계의 우려가 반영된 움직임으로 읽힙니다.
정부도 이러한 목소리를 외면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관련 간담회를 개최해 업계 의견을 수렴하고는 있죠. 하지만 시행이 불과 한 달여 앞으로 다가온 현재, 실질적인 대안과 지원책이 따라주지 않는다는 게 업계의 평가입니다. 기술 발전을 촉진하면서도 시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균형 잡힌 규제’는 모든 국가가 풀어야 할 과제입니다. 한국이 세계 최초로 답안지를 내놓으려는 만큼, 그 내용이 현장의 생동감을 담보할 수 있도록 신중한 마무리 작업이 필요한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