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호황이 낳은 역대급 예산안
정부가 내년도 예산안을 820조 9천억 원 규모의 역대 최대로 확정하면서 이른바 '슈퍼 예산' 시대를 열었습니다. 이번 예산안은 반도체 경기 호황에 따른 세수 급증이 가장 큰 배경인데요. 청와대는 내년 법인세 수입만 200조 원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했고, 전체 국세 수입 역시 580조 원 이상에 달할 거라고 밝혔습니다. 이런 흐름이 이어진다면 2030년에는 예산 규모가 1,000조 원을 돌파하는 '천조국' 대열에 진입할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세수가 늘었다고 해서 당장 모두 풀어 쓰는 건 아닙니다. 정부는 이 중 162조 3천억 원을 '미래대응기금'으로 적립해 미래 세수 결손이나 긴급 투자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내년에는 이 기금에서 45조 원을 청년과 지방 등 4개 핵심 분야에 투입하고, 12조 5천억 원은 국가 채무 상환에 쓸 계획입니다. 덕분에 국가 채무 비율은 내년 48.3%에서 2030년 43.9%로 낮아질 전망이라 경제 규모에 맞는 건전한 지출이라는 평가도 나옵니다.
미래대응기금과 정책 엇박자 논란
그런데 역대급 예산안을 둘러싼 우려도 적지 않습니다. 가장 큰 쟁점은 미래대응기금의 운용 방식인데요. 이 기금의 경우 정부가 총액의 30%까지는 국회 의결 없이 임의로 용도를 변경할 수 있어, 사실상 국회의 예산 통제권이 무력화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쉽게 손댈 수 있는 거대한 '돈주머니'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또 한 가지 눈에 띄는 건 정책의 엇박자입니다. 현재 한국은행은 물가와 부채 문제를 이유로 기준금리를 두 달 연속 인상하며 긴축 기조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반면 정부는 대규모 재정 지출을 밀어붙이며 확장적 기조를 이어가고 있죠. 이런 상황에서 대규모 유동성 자금이 시장에 풀리면 물가 상승 압력이 더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옵니다. 물론 정부 측은 고금리로 어려움을 겪는 취약계층 지원을 위해 재정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AI 행정과 디지털 인프라 대전환
행정안전부 예산도 주목할 만합니다. 내년도 행안부 예산은 84조 7천억 원으로 올해보다 10% 이상 늘었는데, 이 중 AI 행정 혁신과 IT 인프라 안정화에 공을 들였습니다. 특히 'AI 민주정부' 구현을 위해 1조 4천억 원 이상을 투입했는데, AI 통합민원플랫폼 구축과 공무원 업무환경 '온AI' 확산 등이 핵심 사업으로 꼽힙니다.
지난해 국가정보자원관리원 대전센터 화재를 계기로 재해복구(DR) 체계 강화에도 속도가 붙었습니다. 내년에 이중 운영체계 구축에 2,716억 원을 투입하고, 민간 클라우드 이전에도 548억 원의 신규 예산을 편성했습니다. 재난안전 분야 예산 역시 1조 8천억 원으로 10% 넘게 늘려 도심 저지대 침수 방지와 드론 기반 재난 관제 체계 고도화에 나설 계획입니다.
다만 전문가들은 AI와 미래 산업에 집중된 예산을 사회보장과 취약계층 지원으로 조금 더 이동시켜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일회성 지원이 아닌 법적 의무 지출로 전환하고 세금 기반을 보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여전합니다. 반도체 특수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장담할 수 없는 만큼, 예산의 균형과 지속 가능성을 두고 국회에서의 치열한 논쟁이 예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