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 삼겹살집에서 만든 파트너십
지난 6월 초 서울 홍대입구의 한 삼겹살집에서 이례적인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최태원 SK회장, 구광모 LG회장, 이해진 네이버 의장과 마주 앉아 직접 고기를 구워 먹었고,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깐부치킨에서 젠슨 황과 치맥을 나눴습니다. 이런 소탈한 만남은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라, 한국 기업과의 동맹을 대중에게 각인시키는 강력한 이미지 전략이었습니다. 실제로 LG 사옥 로비에서는 구광모 회장이 직원들에게 사인을 해주는 모습까지 포착되며 권위적인 총수의 옷을 벗는 분위기가 연출됐죠.
PC방을 찾아 미출시 노트북 'RTX 스파크' 증정권을 나눠준 것도 눈길을 끌었습니다. 온디바이스 AI를 구현하는 이 제품은 엔비디아가 마이크로소프트와 공동 개발한 신작으로, 젠슨 황이 직접 실물을 최초 공개한 장면은 젊은 세대와의 소통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컸습니다.
HBM부터 로보틱스까지 협력의 스펙트럼
겉으로는 가벼워 보였지만, 이번 방한의 속내는 결코 가볍지 않았습니다. 엔비디아가 제시한 '네 가지 선물'은 한국 산업의 지형을 바꿀 만한 내용들이었습니다. SK하이닉스와는 차세대 HBM4를 넘어 베라 루빈, 베라 CPU용 메모리를 공동 설계하기로 했고, 삼성전자와는 7세대·8세대 HBM 공급 및 파운드리 협력을 구체화했습니다. 이는 단순 부품 공급을 넘어 설계 단계부터 참여하는 '전략적 공동 설계자'로서의 지위를 확보한 것입니다.
모빌리티와 로보틱스 분야에서도 동맹은 속도를 냈습니다. 현대차그룹과는 자율주행 플랫폼 '드라이브 하이페리온'을 중심으로 로보택시 사업을 확대하기로 했고, LG는 전장 부품과 휴머노이드 로봇 분야에서 협력을 다졌습니다. 두산그룹과도 산업용 로봇과 피지컬 AI를 결합한 솔루션 개발을 추진 중입니다. 이런 움직임은 테슬라의 수직 계열화에 맞서 엔비디아가 한국 기업들과 '오픈 플랫폼 연합군'을 구축하려는 포석으로 풀이됩니다.
황금기 이면에 드리운 의존과 과제
기회가 컸던 만큼 우려도 적지 않습니다. 엔비디아에 대한 높은 의존도가 심화되면서 국내 기업의 투자 방향이 엔비디아의 로드맵에 맞춰지는 '종속성'이란 그림자가 드리워졌습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간의 과도한 경쟁도 부메랑이 될 수 있고, 핵심 인재들이 엔비디아 등 해외 기업으로 유출된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결국 이번 방한이 한국 산업에 남긴 과제는 명확합니다. 메모리 반도체의 강점을 살려 시스템 반도체 파운드리 생태계를 키우고, 현대차와 LG 등의 제조 역량을 결합해 독자적인 'K-AI 하드웨어 표준'을 만드는 것이죠. 삼겹살과 치킨으로 시작된 동맹이 진짜 성과를 내려면, 단순한 분주함을 넘어 선도적인 기술 생태계를 구축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