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똥은 관세에서 비관세로 옮겨탔다
한미 통상 협상의 초점이 바뀌었습니다. 지난해 말까지 한국을 위협했던 미국의 관세 재인상 위협은 국회의 '대미투자특별법' 조기 처리로 일단 불이 꺼진 모양새인데요. 그 불똥이 이제 '비관세 장벽' 문제로 옮겨붙었습니다. 미국이 요구하는 건 고정밀 지도 반출 허용, 디지털 플랫폼에 대한 규제 완화, 자동차 수입 제한 완화 등이 핵심입니다. 지난 2월 11일 하루 동안 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릭 스위처 미국 무역대표부(USTR) 부대표와의 90분 면담에 이어, 주한미국상공회의소(암참)와의 간담회까지 소화하며 긴박하게 움직였습니다. 한국 정부의 일정만 봐도 비관세 문제가 얼마나 급한 현안인지 느껴집니다.
사실 관세 문제는 상대적으로 명확했습니다. 미국이 한국에 투자 유치 확대를 요구했고, 한국 국회가 관련 법안 처리에 속도를 내며 해소 국면으로 접어들었죠. 암참 간담회에서 여 본부장이 "미국의 대한 투자가 사상 최고"라며 감사를 표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입니다. 하지만 비관세 장벽은 훨씬 더 복잡하고 민감한 문제들로 가득합니다. 특히 디지털 분야에서 한국의 데이터 주권 및 보안 규정과 미국 기업들의 자유로운 활동 요구가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죠.
데이터 주권과 기업 활동 보장의 줄다리기
가장 첨예한 갈등 지점은 고정밀 지도 데이터의 국외 반출 문제입니다. 미국 기업들은 해외 데이터센터를 이용하면서도 안보 위협을 차단할 기술적 방안을 제시하며 반출 허용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반면 한국 정부는 국가 안보와 국민 개인정보 보호를 이유로 국내 데이터센터 보관 원칙을 고수하고 있어요. 이는 단순한 통상 이슈를 넘어 국가 주권과 직결된 문제라 협상이 쉽지 않을 전망입니다.
또 다른 쟁점은 디지털 플랫폼 규제입니다. 미국은 한국의 개정 정보통신망법 등이 미국 기업을 차별한다는 우려를 공식적으로 표명했습니다. 예를 들어, 망 사용료(트래픽 비용) 부과 계획에 대해 미국은 넷플릭스 등 글로벌 콘텐츠 사업자가 국내 통신사에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제도에 강력히 반대하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는 이 규제들이 특정 국가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고 설명하며 설득에 나서고 있지만, 미국 측의 인식 전환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자동차와 농산물 분야는 상대적으로 합의점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미국이 요구하는 자동차 배출가스 인증 절차 간소화나 농산물 검역 효율화 등은 상호 교역 확대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분들이라 실질적 타협이 가능한 영역으로 평가받고 있어요.
안정적 통상환경을 위한 소통의 지속
현재 협상은 지난해 11월 한미 정상회담 후 발표된 '조인트 팩트시트'의 이행 현황을 점검하는 차원에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비관세 장벽 논의를 본격화할 한미 FTA 공동위원회 개최가 지연되면서 협상 자체가 난항을 겪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협상 테이블이 제때 마련되지 않으면, 불만만 증폭될 뿐 해결은 요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위기감 속에서 한국 정부가 선택한 전략은 적극적인 소통입니다. 하루 만에 미국 통상 당국과 현지 기업들을 모두 만나 양측의 입장을 전달하고 이해를 구한 것이죠. 산업부는 앞으로도 외국인 투자기업의 의견을 정책에 반영하고, 미국 측과의 소통 채널을 지속해 안정적인 통상 환경을 조성하겠다는 계획입니다. 암참의 제임스 김 회장이 한국 정부 노력에 대한 지지를 표명한 것은 일단 고무적인 신호로 읽힙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데이터 주권과 기업 활동의 경계를 어떻게 설정할지에 대한 명확한 원칙이 필요해 보입니다. 단순히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거나 일방적으로 거부하는 것을 넘어, 한국의 안보와 경제적 이익을 모두 고려한 창의적인 중간 해법을 모색할 때입니다. 통상 교섭의 불이 관세에서 비관세로 옮겨붙은 만큼, 더 섬세하고 지속적인 소화 작업이 필요한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