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년 된 '배임죄' 폐지 논란: 기업 활동 vs 재벌 견제, 사법 리스크까지
정부와 여당이 72년간 유지해 온 형법상 배임죄 폐지를 추진하면서 우리 사회에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경영계는 배임죄가 기업의 혁신과 투자를 위축시킨다고 주장하며 폐지를 촉구하는 반면, 시민사회와 법조계에서는 재벌 총수 일가의 불법 행위를 통제할 중요한 수단이 사라질 것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재명 대통령의 재판과 연관되어 정치적 논란까지 불거지며 그 귀추가 주목됩니다.
기업 활동 위축 우려 vs. 재벌 통제 수단 상실 우려
배임죄는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사람이 임무에 위배하여 자신 또는 제3자에게 재산상 이익을 취득하게 하고 본인에게 손해를 가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법입니다. 경영계는 배임죄의 구성 요건이 추상적이고 모호하여, 경영 과정에서의 합리적 판단이 자칫 배임으로 몰릴 수 있다는 점을 들어 기업 활동을 위축시킨다고 지적합니다. 이에 따라 상법상 이사의 주주 충실 의무 도입과 함께 배임죄 폐지를 주장하며, 실제로 배임죄 관련 신고 건수는 연 2000여 건에 달하지만 1심 무죄율이 6.9%로 높다는 점을 근거로 듭니다.
반면, 시민사회는 배임죄 폐지가 재벌 총수 일가의 전횡을 막는 마지막 보루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많은 재벌 총수들이 연루된 불법 행위가 배임죄에 해당하며, 이를 폐지할 경우 그들이 처벌받을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배임죄 폐지 논의가 재벌 총수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비판하며, 형사 사법의 공백과 법적 형평성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고 우려합니다.
배임죄 폐지가 이재명 대통령 재판에 미칠 영향
배임죄 폐지 논의가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는 지점은 이재명 대통령과 관련된 재판입니다. 이 대통령은 대장동·백현동 개발 특혜 의혹, 경기도 법인카드 유용 사건 등에서 배임 혐의로 기소된 상태입니다. 형법상 원칙인 '신법 우선 적용'에 따라 배임죄가 폐지되면, 해당 행위가 더 이상 범죄가 되지 않거나 형이 가벼워지는 경우 개정된 법률이 적용되어 유·무죄를 따지지 않고 소송이 종결되는 '면소 판결'을 받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는 김만배, 유동규 등 사건 관련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부와 여당은 이러한 '사법 리스크 해소' 논란을 의식하며 '소급 적용 금지' 부칙을 신설하는 방안을 검토 중입니다. 만약 개정 법률 부칙에 '개정 법률 시행 이전의 행위에 대해서는 종전 법률을 적용한다'는 내용을 담는다면, 이 대통령의 재판은 배임죄 폐지 이후에도 기존 형법에 따라 계속 진행될 수 있습니다. 법무부 또한 배임죄 폐지와 함께 대체 입법 수립 방안을 면밀히 검토하며, 신법이 미칠 영향을 종합적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방탄' 논란과 법적 형평성 문제
국민의힘 등 야권에서는 배임죄 폐지 추진을 이 대통령의 사법 리스크를 피하기 위한 '방탄'이라고 맹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 배임죄 완화 및 폐지를 주장했던 자신들의 전력이 있어, 이러한 비판이 설득력을 얻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한편, 이미 배임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거나 재판을 받고 있는 다른 재계 인사들의 경우, 배임죄 폐지가 법적 형평성을 해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됩니다. 예를 들어 최신원 전 SK네트웍스 회장은 이미 실형이 확정되었으나, 유사 혐의로 재판 중인 박삼구 전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 조현범 한국앤컴퍼니그룹 회장 등은 배임죄 폐지 적용 시기에 따라 면죄부를 받을 가능성이 열릴 수 있습니다.
향후 과제와 전망
배임죄 폐지 논쟁은 단순한 법 개정을 넘어 기업 생태계, 사법 시스템, 그리고 정치권의 민감한 이슈들을 복합적으로 얽고 있습니다. 정부는 배임죄 폐지 시 발생할 수 있는 처벌 공백과 법적 형평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대체 입법 마련에 집중해야 합니다. 또한, 내부자 고발 활성화, 집단 소송제 확대 등 실효성 있는 견제 장치를 마련하여 투명한 기업 지배구조와 공정한 시장 질서 확립이라는 당초 취지를 살려야 합니다.
미국, 영국 등 영미법계 국가에서는 형사범죄로서의 배임죄를 두지 않고 민사 영역에서 다루는 경우가 많지만, 독일이나 일본 등은 여전히 형사범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해외 사례를 참고하되, 한국의 현실에 맞는 균형 잡힌 법 개정 작업이 시급한 상황입니다.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고 국민적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는 신중하고 세밀한 접근이 요구됩니다. 궁극적으로 배임죄 폐지 논의는 기업 활동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동시에, 경제 범죄에 대한 엄정한 법 집행이라는 두 가지 가치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는 과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