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시총 하루에 2,026조 원 증발
미국 5월 고용 시장이 예상보다 훨씬 뜨거웠습니다. 지난달 비농업 일자리가 17만 2천 명 증가하며 시장 전망치인 8만 명을 두 배 이상 웃돌았는데요. 이 '깜짝 고용' 소식에 연준의 금리 인하 지연 우려가 현실화되면서 글로벌 금융 시장에 투매가 쏟아졌습니다. 특히 AI 랠리를 이끌던 반도체주의 타격이 컸습니다. 필라델피아 반도체지수가 10.3% 폭락하며 2020년 3월 이후 최대 낙폭을 기록했고, 미국 상장 반도체 기업들의 하루 시총 감소 규모가 약 1조 3,000억 달러, 한화로 약 2,026조 원에 달했습니다. 나스닥 지수 역시 4% 넘게 급락하며 1년 만에 최대 낙폭을 기록했는데요. 엔비디아는 시총이 3,000억 달러 이상 날아갔고, 마이크론은 13%, AMD는 11%, 마벨 테크놀로지는 17% 각각 동반 급락했습니다.
국내 증시도 직접적인 후폭풍을 맞았습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이미 전 거래일에 각각 6.4%, 9.92% 하락했는데, 고점에서 매수한 개인 투자자들 사이에서는 이른바 '공포의 월요일'을 앞두고 극도의 불안감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신용융자 규모가 사상 최대인 상황에서 주가 하락이 이어지면 반대매매가 쏟아질 위험이 커졌고요. 원·달러 환율은 1,559원까지 치솟으며 2009년 이후 17년 만에 최고치를 새로 썼습니다.
반도체주 폭락의 세 가지 뇌관
이번 급락의 도화선은 브로드컴의 분기 실적에서 찾아옵니다. 브로드컴의 맞춤형 AI 칩 사업 수요가 시장의 높아진 눈높이에 미치지 못했다는 평가가 나오면서, AI 칩 시장의 성장 정점이 지났다는 의문이 확산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동안 급등했던 반도체주의 밸류에이션 부담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자리가 되었는데요. 여기에 예상보다 강한 고용 지표가 금리 인상 공포를 더했습니다. 베스 해맥 클리블랜드 연은 총재는 물가 상승률 고착화 증거가 확인될 때까지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더 큰 정책 조정과 비용이 필요하다고 경고했습니다.
또한 기업가치 1조 7,500억 달러로 거론되는 스페이스X의 초대형 기업공개가 예정되어 있어, 고평가 기술주에서 유동성이 빠져나갈 수 있다는 경계심도 투심을 옥죄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좋은 경제 지표가 나왔음에도 시장이 하락하는 상황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며 금리 인하 필요성을 언급했지만, 시장의 불안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조정일까, 강세장 끝일까
시장 전문가들은 이번 하락의 성격을 두고 의견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제러미 시걸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명예교수는 가파른 상승 뒤 나타나는 단기 고점에서의 차익 실현 매물이라며, 강세장의 종착점은 아니라고 진단했습니다. 실제로 필라델피아 반도체지수는 이번 급락에도 불구하고 연초 대비 73% 상승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요. 반면 '간달프'로 불리는 마르코 콜라노비치 JP모건 전략가는 AI 모멘텀주가 70% 하락해야 진짜 투매가 시작된다며 강하게 경고했습니다.
다만 현재로서는 엔비디아의 대규모 수주와 브로드컴의 전망 유지, 빅테크 기업들의 투자 확대 계획이 유지되고 있어 AI 산업 자체의 침체를 단정하기는 어려운 상황입니다. 결국 HBM을 비롯한 국내 반도체주의 실질적 수요를 좌우하는 변수는 마이크로소프트, 메타, 구글, 아마존 등의 데이터센터 자본지출 규모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다음 주 발표될 미국의 5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금융 시장의 다음 방향을 가늠할 중요한 분수령이 될 전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