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연극계의 산증인이자 ‘대부’로 불리는 김정옥 연출가가 17일 향년 94세를 일기로 별세했습니다. 60여 년 동안 200편이 넘는 작품을 무대에 올리며 한국 현대 연극의 토대를 마련한 그는, 단순히 많은 작품을 연출한 인물을 넘어 서구 연극을 한국적 미학으로 재창조하고 한국 연극을 세계 무대에 올리는 데 일생을 바친 중추적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되었고, 발인은 20일 오전 7시 30분입니다.
김정옥 연출가는 1932년 광주에서 태어나 서울대 불문학과를 졸업한 후 프랑스 소르본대학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유학 시절 극작가 유치진을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연극의 길에 들어섰고, 이 인연은 이후 국제연극협회(ITI) 활동으로 이어지며 그의 국제적 행보의 시발점이 됐습니다. 1959년 귀국 후 중앙대 연극영화학과 교수로 부임하며 연극 교육과 창작의 현장에 뛰어들었죠.
민중극장에서 극단 자유까지, 연극계의 새 지평
1961년 이화여대 연극반의 ‘리시스트라다’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연출 활동을 펼친 그는, 1963년 민중극장 창단에 참여하며 한국 연극계의 중심에 섰습니다. 민중극장의 창립 공연 ‘달걀’과 부조리극 ‘대머리 여가수’에는 박근형, 김혜자, 추송웅 등 당대 최고의 배우들이 출연하며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특히 ‘대머리 여가수’는 원작자 외젠 이오네스코로부터 직접 찬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는 1966년 이병복과 함께 극단 ‘자유’를 창립하며 독자적인 연극 세계를 구축해 나갔습니다. 극단 자유는 ‘따라지의 향연’ 같은 작품을 통해 실험적인 시도를 이어갔고, 박정자, 김용림, 최불암, 윤소정 등 수많은 명배우들을 배출하며 한국 연극계의 산실 역할을 했습니다. 이 시기 그의 작업은 살롱 드라마부터 몰리에르 희극, 부조리극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다양한 장르를 번역하고 소개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전통과의 접목, 한국적 연극의 탄생
1970년대 후반, 김정옥 연출가의 작업에는 중요한 전환이 찾아옵니다. 서구 연극의 형식을 넘어 한국만의 독자적인 미학을 찾고자 한 시도였죠. 1978년 작품 ‘무엇이 될고하니’를 기점으로 그는 한국의 전통 연희와 굿(巫俗)의 형식을 본격적으로 연극 무대에 도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형식의 차용을 넘어 내용과 정신의 한국화를 지향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이후 ‘피의 결혼’(1984), ‘바람은 불어도 꽃은 피네’(1984) 등에서 그의 이러한 시도는 더욱 깊어졌고, 서구 연극을 한국의 정서와 미학으로 재해석한 ‘제3의 연극’이라는 독창적인 경지를 열어보였습니다. 그의 이런 노력은 한국 연극이 세계 연극사에서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습니다.
아시아인 최초 ITI 회장, 한국 연극 세계화의 선구자
김정옥 연출가의 발자취는 국내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1991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선출된 그는, 1995년에는 아시아인 최초로 국제연극협회(ITI) 회장에 올라 3차례 연임하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ITI 회장으로서 그는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남미 등 전 세계를 순회하며 한국 연극을 소개하는 공연과 워크숍을 개최했고, 한국 연극의 국제적 네트워크를 확장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의 공로는 국제적으로도 널리 인정받았습니다. 2002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프랑스 최고 등급 문화예술 공로 훈장인 ‘코망되르’를 수상했으며, 2024년에는 금관문화훈장을 수훈했습니다. 또한 2004년에는 ‘얼굴박물관’을 개관하여 ‘뮤지엄시어터’를 지향하며 대중의 문화예술 향유 기회를 넓히는 데도 기여했습니다.
그의 별세는 한국 연극계에 남긴 유산이 얼마나 컸는지를 다시금 되새기게 합니다. 서양 연극을 한국적으로 소화해 내고, 한국 연극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며, 후대를 위한 교육과 제도 마련에까지 헌신한 그의 60년 발자취는 한국 현대 연극사의 한 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의 작업과 정신은 앞으로도 한국 연극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귀한 길잡이로 남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