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타곤에서 다시 시작된 전쟁의 담론
2026년 9월 11일, 미국은 끔찍한 테러의 기억이 스며든 25번째 추모의 날을 맞았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워싱턴 인근 국방부 청사에서 열린 추모식에 참석해 9·11을 "끔찍한 악의 순간"으로 규정하며 희생자들을 기렸는데요. 그는 이 비극을 결코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도, 발언의 상당 부분을 현재 진행 중인 이란 전쟁과 연결 지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세계 최대 테러 후원국인 이란이 핵무기를 보유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장병들의 숭고한 임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는 7개월째 이어지고 있는 이란 전쟁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의도로 읽히는 대목입니다. 물가 상승과 전쟁 피로감이 커지는 상황에서 9·11의 기억을 소환해 국민적 공감대를 이끌어내려는 전략으로 풀이됩니다. 당연히 이날 행사에서는 국민 통합의 메시지도 함께 전해졌는데, 그는 테러 참혹함 속에서 진정한 미국 정신을 목격했다며 화합을 강조했습니다.
뉴욕과 펜타곤, 갈라진 행보
반면 뉴욕 맨해튼 그라운드 제로에서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조지 W. 부시, 버락 오바마, 빌 클린턴, 조 바이든 전 대통령이 한자리에 모여 희생자 2,983명의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하며 묵념했습니다. JD 밴스 부통령도 뉴욕 행사에 참석해 유가족들과 함께했는데요. 특히 올해는 9·11 관련 질환으로 숨진 구조대원과 주민들을 기리는 묵념이 처음으로 추가되어 희생의 범위가 더 넓어졌습니다.
역대 대통령들이 과거에는 펜타곤, 그라운드 제로, 생크스빌 등 여러 현장을 모두 방문했던 것과 달리,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펜타곤만 찾았습니다. 뉴욕타임스는 정치적 연설이 제한되는 그라운드 제로의 분위기가 트럼프 대통령의 성향과 맞지 않았을 가능성을 제기했고, 실무적으로는 아일랜드 출국 일정과 맞물렸다는 해석도 나왔습니다. 어찌 됐든 전직 대통령들이 통합과 국제 연대를 강조한 것과 달리, 현직 대통령은 군사적 승리를 내세우는 모습에서 미국의 추모 방식이 나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달라진 적의, 변화한 안보 지도
사실 이번 추모식에서 드러난 가장 큰 변화는 미국이 마주한 위협의 성격 자체입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 5월 발표한 대테러 전략에서 마약 카르텔, 초국가적 갱단, 폭력적 좌익 극단주의를 주요 위협으로 제시했습니다. 이는 기존 이슬람 근본주의 중심의 대테러 정책에서 벗어나 안보 위협의 우선순위를 재편한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미국인들의 인식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로이터와 입소스가 함께한 설문조사에서 미국인의 20%만이 외국발 테러를 가장 큰 위협으로 꼽았는데요. 반면 총기 난사 같은 무차별 폭력은 42%, 국내 테러는 33%로 훨씬 높은 위험 인식을 보였습니다. 결국 9·11 25주년이 보여준 것은 과거의 테러와의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과 동시에, 미국이 새로운 적을 향해 시선을 돌리고 있다는 복잡한 현실입니다. 추모의 날이 끝나고 남은 건 희생자에 대한 깊은 애도와 함께, 미국의 안보 정체성이 어디로 향해야 할지에 대한 묵직한 질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