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킨집에서 피운 AI 동맹의 연기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미국 실리콘밸리의 한 한국식 치킨집에서 만나 ‘치맥 회동’을 가졌습니다. 이 만남은 단순한 친교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요, AI 시대를 선도할 핵심 반도체인 HBM(고대역폭메모리)의 공급 계획과 차세대 협력 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습니다. 지난 3일(현지시간) 캘리포니아주 산타클라라의 ‘99치킨’에서 열린 이 회동에는 최 회장의 딸과 황 CEO의 딸도 동반되어, 더욱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비즈니스 이야기가 오갔을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젠슨 황 CEO는 한국 재계 총수들과의 ‘치맥’ 회동에 유독 취향이 있는 모습입니다. 지난해 APEC 정상회의 기간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과도 함께 치맥을 즐긴 바 있습니다. 이번 최태원 회장과의 만남은 그 연장선상에 있으면서도, 시의적절한 협력 논의를 담았다는 점에서 업계의 관심을 집중시켰죠.
HBM4 공급에서 AI 데이터센터까지
이번 회동의 가장 구체적인 의제는 엔비디아의 차세대 AI 가속기 ‘베라 루빈’에 탑재될 6세대 HBM4의 공급 계획이었습니다. SK하이닉스는 현재 엔비디아에 HBM3E를 공급하고 있는 주요 파트너인데요, 다음 세대인 HBM4에서도 선제적인 협의를 통해 공급 라인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으로 읽힙니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와의 경쟁이 예상되는 가운데, SK하이닉스가 성능과 양산성, 품질을 바탕으로 한 기술 리더십을 내세우며 주도권을 잡으려는 전략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협력 범위는 HBM 공급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차세대 서버용 저전력 메모리 모듈인 소캠(SOCAMM)과 낸드플래시 공급, 나아가 AI 데이터센터 구축을 위한 중장기적인 파트너십까지 논의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는 SK그룹이 고성능 메모리 공급자에서 AI 인프라를 포함한 종합 솔루션 제공자로 도약하겠다는 전략과 맞닿아 있습니다. 최태원 회장은 최근 SK하이닉스의 미국 자회사 솔리다임을 ‘AI 컴퍼니’로 재편한 데 이어, 그룹 차원의 해외 AI 투자 컨트롤타워 구축을 계획 중인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번 미국 출장은 이러한 광범위한 비즈니스 판을 깔기 위한 행보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미국 시장 공략과 산업 지형의 변화
최태원 회장은 지난해 9월부터 SK아메리카스 이사회 의장과 SK하이닉스 아메리카 회장을 겸임하며 미국 사업을 직접 챙기고 있습니다. 이번 출장은 최소 2주 이상의 일정으로, 엔비디아 외에도 여러 미국 빅테크 기업 경영진과의 연쇄 회담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한 차례 만남이 아니라, SK그룹의 북미 AI 생태계 구축을 본격화하기 위한 전략적 접촉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입니다.
한편, 이 치맥 회동은 글로벌 AI 반도체 생태계의 구도 변화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기도 합니다. 엔비디아의 AI 반도체 성능을 좌우하는 핵심 부품인 HBM 시장에서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전망입니다. 두 회사 모두 엔비디아의 차세대 플랫폼에 자신들의 HBM4를 탑재시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상황이죠. 이런 경쟁 구도는 결국 기술 발전과 공급 안정성을 높이는 긍정적 효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최태원 회장의 미국 행보는 국내에서 불거진 상속세 관련 논란의 그림자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대한상공회의소의 보도자료 파문 직후 해외에서의 활동 소식이 알려지면서, 그의 촉각은 국내외로 동시에 세워져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AI를 둘러싼 글로벌 협력과 경쟁의 장이 점점 더 뜨거워지는 가운데, 한 치킨집에서의 만남이 가진 무게는 생각보다 훨씬 컸던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