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을 떠날 수 없는 국책은행들
정부의 2차 공공기관 지방이전 추진이 3대 국책은행을 중심으로 거센 후폭풍을 낳고 있습니다. 한국산업은행, IBK기업은행, 한국수출입은행 노동조합은 지난 12일 서울 여의도에서 처음으로 공동 결의대회를 열고 강제 이전에 대한 총력 투쟁을 선언했는데요. 노조들은 반도체와 인공지능 등 국가전략산업을 지원하는 정책금융의 특수성을 이유로 들며, 글로벌 금융 인프라가 집적된 서울에 남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반발이 남다른 이유는 단순한 거주 환경 문제가 아니라 금융 경쟁력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서울에 머물러야 국가 정책금융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다는 논리인데요, 이는 예금보험공사와 금융감독원 등 다른 금융 공공기관들의 반대 목소리와도 맥을 같이합니다. 예보는 금융위기 시 당국과의 신속한 협업을, 금감원은 현장 중심의 감독 효율성을 이유로 각각 서울 잔류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실 국책은행의 서울 잔류는 단순한 주장만으로 끝나지 않는 복잡한 법적 현실이 있습니다. 현행 한국산업은행법, 중소기업은행법, 한국수출입은행법은 모두 본점 소재지를 서울특별시로 명시하고 있는데요. 정부가 이전을 명령하더라도 관련 법률 개정 없이는 물리적인 본점 이전 자체가 불가능한 셈입니다. 법적 문턱을 넘는다 해도 숙련된 전문 인력의 대규모 이탈이라는 변수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산업은행의 경우 남성 직원 이직률이 2021년 3.0%에서 지난해 9.0%로 급증했는데, 이는 임금 격차와 더불어 본점 이전에 따른 고용 불안정이 크게 작용한 결과로 풀이됩니다.
법과 인력이 막는 이전
국책은행들이 서울을 떠나기 어려운 건 법 테두리 안에 이미 발이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세 은행의 설립법은 본점을 서울에 두도록 규정하고 있어, 이전을 위해서는 국회를 통한 법 개정이 필수적입니다. 법 개정이 선행되지 않는 한 어떤 결정도 실행에 옮길 수 없는 구조라는 점이 가장 현실적인 제약입니다. 정부는 아직 이전 대상 기관을 확정하지 않았다고 밝혔지만, 노조들은 선제적 대응에 나선 상황입니다.
인력 유출 문제 역시 간과할 수 없습니다. 국책은행 업무는 기업 구조조정과 대규모 산업금융처럼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하는데, 본점 이전 과정에서 핵심 인력이 빠져나가면 정책금융 수행 역량이 크게 약화될 수 있습니다. 이미 산업은행 내부에서는 불확실성이 이직률 급등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이는 조직 안정성을 해치는 심각한 신호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박상진 회장의 딜레마
이번 논란은 산업은행 박상진 회장에게도 중대한 시험대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산업은행 최초의 내부 출신 수장인 박 회장은 취임 당시 직원 보호와 본점 이전 반대를 전향적으로 검토하겠다고 약속했는데요. 1년이 채 되지 않아 지방 이전 논의가 재점화되면서, 직원들과의 신뢰를 지키면서도 정부 정책과 대립하지 않는 해법을 찾아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습니다.
다만 산업은행이 지역 금융을 외면한 것은 아닙니다. 박 회장은 취임 후 5년간 75조 원 규모의 지역금융 공급 계획을 세우고, 국민성장펀드의 40% 이상을 지방에 투입하는 등 물리적 이전과 별개로 지역 경제 지원에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결국 '본점을 지방으로 옮기는 것'과 '지역에 금융을 공급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점을 부각하며, 조직의 존립과 지역 균형 발전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으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정부의 2차 이전 계획이 구체화될수록 금융권의 갈등은 더 확대될 전망입니다.